기억나니? 네가 여섯 살 때 일이었던 것 같아.
교대근무를 하던 엄마의 잦은 저녁 출근 때문에 너희들 식사는 아빠가 항상 챙기곤 했었지.
그날도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느라 주방에서 정신이 없었을 때
너희들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꺄르륵 대고, 방방 뛰어대며 놀고 있었어.
"얘들아 조심히들 좀 놀아~ 다칠라"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쫓아올까, 밑집에서 집 무너진다고 항의할까 겁이 나
너희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면서도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라는 생각에 더 이상 엄하게 얘기하진 못했어.
그렇게 너희들 노는 소리 그리고, 물이 끓다 못해 가스레인지에 흘러넘쳐 치이익 하면서 꺼지는 소리,
깜박하고 열어둔 냉장고에서 문 좀 닫으라고 삐삐빅 울리는 경고음 소리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쯤
갑자기 안방이 조용해지더라?
"안돼! 하지 마!"
아빠의 외침에 도도도.. 발소리가 나더니 네가 귀신본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지.
"아빠... 저희가 뭐하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 아빠! 어떻게 알았어요? ]
할아버지는 정말 귀신같은 사람이었단다.
아빠가 뭔가 하려고 하면 항상 어떻게 알았는지 쫓아다니면서 못하게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하나하나 설명 안 해도
이미 초능력자처럼 다 알고 계셨어.
"이놈 자식.. 아빠는 너 눈알 굴리는 것 만 봐도 다 알아"
그때 생각했지.
'아.. 아빠는 초능력자구나.."
중학교 들어가면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집에 들어오는 시간도 늦어지던 때가 있었어.
솔직히 집에 일찍 가면 뭐 해? 밖에서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재밌지.
종종 늦게 들어오는 아빠를 보며 할아버지는 매우 크게 혼내셨어.
"이 놈 새끼 친구들하고 싸돌아다니면서 뭐 한다고 이제 들어와!"
'이야... 귀신이네...'
또 한 번은 어차피 늦게 들어올 거면 학원에서 공부라도 하라고 학원을 보내준 적이 있어.
처음 몇 번은 잘 다녔지. 그런데 아빠는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나 봐.
"오늘 학원 째고 피시방이나 가자~"
그렇게 딱 한 번만이란 생각으로 학원 갈 시간에 친구들과 피시방 가서 놀았는데
역시... 학원보다는 훨씬 재밌고 시간도 빨리 가는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안 걸린 거지.
"야야 괜찮아. 어제도 튀었는데 안 걸렸어. 오늘 애들이랑 노래방이나 갈까?"
그렇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며 몇 번씩이나 학원을 빼먹었을 때쯤
그날도 피시방에 가려고 건물에 들어서는데 할아버지한테 전화가 온 거야
"너 어디냐?"
할아버지의 한마디에
'아... 뭐라고 하지? 걸리면 혼날 텐데'
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급하게 머리를 굴려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어.
"친구가 자전거 타다 다쳐서 병문안 왔어요. 지금 병원 앞이에요."
"친구 누구?"
"종현이요"
종현이 삼촌 알지? 아빠랑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서 항상 붙어 다녔었거든.
그래서 종현이가 입원했다고 하면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던 거지.
"많이 다쳤다냐?"
"아직 못 만났어요. 만나보고 말씀드릴게요"
"..."
완벽하게 속였다! 싶을 때쯤 할아버지는 뭔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갑자기 잠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
그리곤
"어디 병원 몇 호실인지 얘기해봐 꽃이라도 보내게"
"!!!!"
와... 그때 진짜 아빠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안 들더라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어.
하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그나마 인간적의 존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단 생각으로 또 머리를 굴렸지
"에이.. 무슨 꽃이에요 요즘애들 그런 거 안 좋아해요"
"... 어. 디. 병. 원, 몇. 호. 실"
할아버지는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씀하셨어.
그때의 숨 막힘이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고개를 흔들게 되더라.
"한국병원.. 3007호요..."
"알았어 끊어"
전화는 끊어졌지만 병원에 하다못해 전화라도 해본다면 거짓말인 게 금방 탄로 날 수 있는 상황이라.
아빠는 툭치면 오줌이라도 지릴 것처럼 몹시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였단다. 그래서 옆에 있던 친구들한테 물어보기 시작했어
"야.. 야.. 어떡하냐? 어떡하지?"
일촉즉발 상황에 아무도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을 때 친구 한 명이 입을 열었어.
"형제여...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어요"
"아 장난치지 말고! 그래서 답이 뭔데?"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면 악마한테 영혼을 팔아도 좋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아빠는 절실했기에
그 친구의 입에서 좋은 해결책이 나오길 손꼽아 기대했지.
"자수해서 광명 찾으세요 형제여~"
"야이.. 장난하냐?"
이런 상황에 장난이나 치는 친구가 짜증 나 멱살을 잡으며 진짜 한 대 때릴 듯이 소리 질렀지.
"컥컥.. 야 솔직히 답은 알고 있잖아. 네가 외면할 뿐이지. 넌 너네 아버지한테 죽을 거야. 차라리 아버지가 알아내기 전에 네가 먼저 자수하면 그래도 좀 덜 아프게 죽지 않을까?'
그 친구는 T야.. 분명 T였을 거야..
하지만 사실인걸 어떡하니 아빠는 진짜 더 이상 시간을 버릴 수가 없었어. 할아버지가 전화해서 아빠 거짓말이 탄로 나기 전에 미리 용서를 구하는 게 그 친구말대로 나을 것 같았던 거지.
떨리는 손으로 수십 번의 심호흡을 하면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어.
- 달칵 -
할아버지 전화받는 소리에 아빠 심장은 한 번 더 내려앉았지.
"아.. 아빠?"
"집에 일찍 들어가라"
"아 그게 사실.. 종현이가 입원.."
"알았으니까 적당히 놀다가 들어가라고"
"전화해보셨어요?"
"전화는 무슨. 너 인마 아빠가 진짜 몰라서 물어본 것 같냐?"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던 거야. 학원 안 갔던 것도 친구들이랑 놀러 다녔던 것도. 다 알고 계셨음에도
얼마나 놀고 싶으면 저럴까, 얼마나 공부하기 힘들면 저럴까, 얼마나 답답하면 저럴까 하며 최대한 아빠를 어떻게든 이해해하려 하며 그냥 모른 척 넘기셨던 거지.
할아버지의 초능력을 몇 번이나 겪어 놓고서도 아빠는 항상 할아버지를 속이려 했던 것 같아.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심에도 그냥 넘어가거나 정말 안 되겠다 싶을 때는 매도 들면서
항상 아빠를 괴롭혔지만 말이야.
근데 사실 말이야. 아빠는 할아버지가 너무 싫었어.
뭐만 하면 다 못하게 하니까 말이야. 대학 다닐 때였나? 친구들과 밤늦도록 술 마시고 들어온 늦은 저녁
-삐비비빅 따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고개만 먼저 들이민 채 집안을 살피고 잇었어. 맞아 할아버지가 집에 계신지
확인하는 중이었지.
그때 네 고모가 입에 빵조각을 물면서 주방에서 거실로 걸어가더라고
'아유.. 다이어트한다는 게 맨날 저러네..'
할아버지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몰라 고모를 큰소리를 부를 수가 없어 이쪽을 쳐다봐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느낌이 싸한지 고모가 온몸이 정지된 상태에서 고개만 천천히 아빠 쪽으로 돌리더니 드디어 눈이 마주쳤어.
"꺄악!!!"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나자빠지는 거야.
"오.. 오빠? 거기서 뭐 해? 귀신인 줄 알았잖아"
아빠가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현관문 앞에서 고개만 내밀고 잇으니까 고모가 깜짝 놀란 거지.
아빠는 목소리를 죽여가며 말했어.
"야 쉿! 조용해... 아버지.. 아버지 오셨어?"
"어 오셨다."
안방문이 열리며 할아버지가 나오셨고 그날 참 많이 혼 낫던 것 같아.
"니 나이가 몇인데 어쩌려고 그러냐? 대학생 됐다고 공부는 안 하고 허구한 날 술만 퍼마시고..."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무서운 아버지인데 그날따라 두려움보다는 화가 났던 것 같아.
항상 내 기분, 내상황, 내 마음은 몰라주고 본인 뜻대로만 하려고 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거야.
"술 마실 시간에 여행도 좀 가고, 경험도 좀 쌓고 어? 이 놈 새끼야 내가 하도 답답.."
"아버지는 몰라요! 아버지가 내 맘을 알아요? 내가 뭐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어떤 꿈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그렇게 처음 할아버지한테 대들었던 것 같아. 화난 목소리를 뱉어내면서도 두려움에서였는지 설움이 폭발한 건지 아빠 얼굴은 마치 세수한 것처럼 눈물로 이미 축축해져 있었단다.
"이제 나도 성인이니까 내 맘대로 할 거예요! 아버지처럼 안 살 거니까 걱정 마세요!"
하며 문을 꽝닫고 방으로 들어갔어.
평상시 같으면 크게 소리 지르며 방문을 두드리면서 문열으라고 화를 내셨을 할어버지 임에도.
그날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
시간이 흘러 아빠도 나이를 먹고 할아버지 머리에서 더 이상 검은색 머리카락을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할아버지랑 그런 애기를 한적 있어.
"아버지. 그때 안서운 하셨어요?"
"서운했지. 적어도 내 새끼들한테 떳떳하게 멋있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처럼 안 살겠다는데 안서운 할리가 있겠냐?"
"그때 아버지는 왜 화를 내시지 않았어요? 무슨 생각하셨어요?"
"... 니 할아버지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겠지 라는 생각?"
아들아, 아빠는 말이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고 왜 서운해하는지, 왜 그것을 하고 싶어 하고 어떤 것을 바라는지 다 알고 있단다. 그렇다고 아빠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빠는 초능력자가 아니야.
단지 아빠가 살아왔던 모습, 거짓말하고 덜덜 떠는 너희들의 모습이 마치 수십 년 전 내 모습과 같아서.
내가 가고 후회했던 길을 네가 걸으려는 것 같아서. 좀 더 나은 길로 가라는 욕심에
좀 더 좋은 것만 보면서 가라는 마음이 어쩌면 너희들을 숨 막히게 했는지 몰라.
아빠가 되고 너희들을 키우면서 점점 나와 닮아 가는 너희들을 보니까.
아빠의 초능력은 초능력이 아니라 관심과 애정, 희망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었단 걸 알게 되었단다.
"아빠... 저희가 뭐하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음.. 아빠는 초능력자라서 너희가 뭐하는지 안봐도 다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