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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수 Jan 27. 2019

너무 심한 자책은 우울을 부른다

자책은 쉽게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된 자책은 병으로 번진다

저는 평생 스스로를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얼굴도 못 생겼고, 운동도 못 하고, 공부도 못 하고,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다고 여겼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말에 쉽게 상처 받기도 했고, 상처 받는 와중에도 그런 제 자신이 더 싫어졌습니다.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에 스스로 더 실망했으니까요.

10대 때 시작된 자기혐오는 20대를 지나 30대 초반까지 이어졌습니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거치면서 내가 스스로 칭찬할 만한 구석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이것만큼은 내가 누구보다 잘한다'거나 '이런 부분은 나도 나쁘지 않지'라고 생각이 들 만한 부분도 찾지 못했습니다.


언제 어딜 가도 늘 존재감이 없는 편이었고, 그때그때 적당히 살아가는 인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 안도하기보다 자책하는 쪽이었습니다. '넌 늘 이렇게 누군가의 뒤에 숨어서 적당히 중간쯤으로 살다 가겠지'하고 자신을 비웃기도 했습니다.


자책, 스스로 나를 절벽으로 밀어내는 말들


2016년 1월부터 시작해 2019년 1월이 된 현재까지 우울증으로 정신과에서 치료받으며 상담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3년에 걸친 치료 과정에서 몇 가지를 발견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너무 심하게 자책하며 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10대부터 시작된 우울 성향 이후, 전 항상 제가 미웠습니다. '내가 나의 가장 심한 안티'일 정도였다고 하면 적당한 표현이 될까요. 무언가 작은 실수를 저지를 때도, 혹은 인생에서 중요한 기로가 되는 시점에서 잘못된 선택을 내릴 때도 스스로 크게 자책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넌 정말 하찮고 한심한 인간이야. 니 수준이 고작 그 정도라고.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잖아?'


그런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 점점 쌓여만 갔고, 어느 시기를 지나면서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졌습니다. 누가 나를 직접 탓하지도 않은 상황이라도, 실수를 저지른 후 내가 먼저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그러다가 우울증이 심해질 땐 나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더 날카로워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아? 실수만 하면서 주변에 폐만 끼치잖아. 차라리 지금이라도 죽어버리는 게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일걸.'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자책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시작됐습니다. 업무나 인간관계, 여러 면에서 실패한 인간이라고 자신을 평가하게 될 때쯤 '그냥 삶을 끝내는 게 주위에 민폐 끼치지 않는 일'이라고 결론짓게 된 겁니다. 말로 내가 나를 점점 절벽으로 밀어내던 거나 마찬가지였죠.


나에 대한 기대를 조금은 내려놓자


'자기혐오는 나르시시즘의 맞은편에 있는 것'이라는 말도 있죠. 예전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요즘엔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내가 나를 너무 미워했던 것도 어쩌면 스스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실 돌아보면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직접적으로 크게 지적받는 일이 없는데도, 나에게 실망해서 자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식의 자책이 늘어나니 '다른 사람들도 날 싫어하겠지'라는 불안이 자라나면서 어느 순간 확신이 되어버리기도 했고요. 결국 마지막에는 '나 같은 건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을 텐데'라는 극단적인 생각에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기대란 언덕의 꼭대기와 같고, 현실은 바닥과 같죠. 실망은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곧장 추락하는 일이고,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충격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앞선 글에서 밝혔던 것처럼, 우울증으로 상담받으며 '내가 어느 상황에서 불안해지고 어느 지점에서 우울해지는지' 깨닫기도 했죠.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는 걸 멈추려면 기대를 너무 높게 잡지 말고 때로 자신을 놓아주기도 해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런 이후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못 하는 걸 구분해서 미리 대처하게 됐어요. 소소하게라도 내가 잘 해낸 일은 '오늘은 나쁘지 않았다'라고 긍정적으로 자평하는 것도 심리적으로 도움이 됐습니다.


우울증 치료를 받으며 자책을 줄이기까지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기 전까지, 저는 정말 궁금해하며 살았습니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미운 걸 어떻게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거지?' 내가 자기혐오가 심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던 거죠.


'나'라는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모두 들여다보게 되는 존재였기 때문에, 나쁜 생각이나 나도 모르게 피어나는 저열한 감정을 모두 감당해야 하죠. 자존감이 낮고 스스로 너무 미워 보일 땐 그게 감당이 안 됐던 겁니다.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던 첫 해 어느 땐가,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문득 기억나네요. 누구나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면서 지내지는 않는다고, 때로 어떤 사람들은 뻔뻔할 정도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 탓만 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고요.


그러면서 저 보고도 '때로 남 탓을 하며 살아도 된다. 아니, 너무 자책하기보다 그게 나을 때도 있다'라고 하시더군요. 전 30년 가까이 사는 동안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책만 하며 지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 모든 걸 남 탓으로 돌리는 게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나의 잘못이 아닌 상황에서도 나를 탓하고 넘어가는 게 습관이 되면, 그런 식으로 자책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정말 심각한 병으로도 번질 수 있다는 거죠. 제 경우가 그랬습니다.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자책이었거든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와중에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나 때문이야, 이게 다 내가 못 나서 그런 거야...'하고 지내는 정도였으니까요.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면서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것도 제겐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하지만 항우울제와 항불안제가 다 해주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자책하는 습관을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우울한 감정과 자책이 솟구쳐 오르면, '괜찮다. 자책하지 말자. 괜찮다'라고 되뇌면서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다시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자책하고 지나가는 걸 멈추려고요.


경우마다 다르겠지만, 자책을 줄이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젠 우울해지거나 불안에 빠져도 다음 날까지 그런 감정이 이어지진 않습니다. 덕분에 이젠 항불안제 복용을 끊고 항우울제도 최소 용량으로 복용 중입니다. 선생님과 상담한 끝에 올해 안에 항우울제 복용도 끝낼 수 있을 듯합니다. 아직 과정에 있지만요.


우울증으로 3년 넘게 치료받으며 느낀 건, 이게 순식간에 씻은 듯이 낫는 병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울증을 흔히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감기처럼 치유되면 완전히 낫는 질병과는 다르겠죠.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우울과 불안은 사실 살아가면서 늘 곁에 있을 테니까요. 어느 정도 조절하면서 지내는 게 더 정확한 방향일 거예요. 다만 자책을 줄여가면서 조절 가능한 범위에 어느 정도 들어선 느낌입니다. 아직 멀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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