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답은,
코로나로 바뀌어버린 일상을 살아간지도 벌써 아홉 달이 지나간다.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코로나 때문에 완전히 변해버린 일상. 아마도 우리 모두는 다 적응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겠지? 어떻게든 적응하며 사는 걸 보면 인간이란 참 적응을 잘하는구나 싶다. 코로나는 적응 못하고 어서 지구를 떠나버렸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시작된 코로나로 인한 변화처럼, 올해는 이상하리만큼 유독 일이 많았다. 덕분에 ‘일감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지’ 하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두 달이 남긴 했지만, 작년보다 더 풍족한 한 해다. 코로나로 다들 어려운 시기였지만, 개인적으로는 프리랜서 생활 중 가장 안정적인 일 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안정적인 건 겨우 일 년짜리 단기 보험과 같다. 보장도 일 년짜리. 올해만큼 일이 많이 들어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가올 미래를 향해 마음은 다잡을 수 있지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래서 결국 계획이란 걸 할 수 없는 게 프리랜서다.
오늘 만난 클라이언트가 내일도 클라이언트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내일’이라는 날이 와 봐야 알 수 있다. 그 날을 내다볼 수 없는 나는 클라이언트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도 꾹 참는다. 비록 말 한마디에 순간 상처를 받더라도, 이겨내고 견뎌야 하는 건 내 몫이다. 혹시 내일의 클라이언트가 될지도 모르니까.
일을 마치고 그에 대한 대가(돈)를 받을 때, 마치 내가 돈을 구걸하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분명 일은 상호 간에 진행된 건데. 일을 했으니 돈을 받는 건 당연한 행위인데. 늘 클라이언트는 언제 줄 건지 말해주지 않는다. 빨리 달라는 거 아닌데. 언제 지급되는지 그거 알려달라는 건데, 그거 하나 말해주기 귀찮고 어려운 일인가 보다.
‘프리’라는 단어가 붙는 프리랜서는 절대 ‘프리’ 하지 않다. 직장이라는 곳에 얽매이지 않으니 겉보기엔 그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특히나 나처럼 생계형 프리랜서의 경우는 더하다. ‘때가 되면 돈이 들어오겠지’ 하는 생각은 사치다. 언제 들어올지 모른 채 마냥 기다리는 일이 프리랜서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아마 클라이언트는 모를 거다. (모르니까 그러겠지?)
안정적이지만 안주하고 싶지 않아서 프리랜서의 길로 들어섰다.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엄청난(?) 작업을 한다거나, 떼돈을 번 건 아니지만 스스로는 분명 디자이너로서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왔다. 눈에 확연하게 띌 만큼의 거리는 아니더라도, 다니던 회사에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절대 걸어오지 못할 만큼의 거리다.
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안정적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나는 늘 고민한다. 디자이너로서 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새롭고 흥미로운 일에도 과감히 도전하려 하지만, 안정적이고 싶은 마음에 때로는 클라이언트에 휘둘리기도 하고 가끔은 열정 페이로 일을 하기도 한다. 서른 중반이 넘었는데도. 아예 안 버는 것보단 나으니까.
어느 정도 기준을 정해두고 나만의 방식으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일을 진행하는 걸 홀로 5년을 지내왔다. 안주하고 싶지도 않고 안정적이고도 싶은 이 갈대 같은 마음은 먼 미래의 꿈같은 포부가 아니라, 그냥 현실 속에서 매일같이 겪는 질문일 뿐이다. 하루하루 매일 똑같은 질문에 매번 똑같이 고민하는 와중에, 안정적이고 싶어 디자이너의 자존심 구겨가며 일해서 돈을 벌기도 하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주하지 않으려 내 일처럼, 또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보고자 최선을 다해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실 나는 걱정이 꽤 많은 편이다. 학창 시절부터 별명이 ‘김걱정’ 일 정도로 진짜 걱정이 많았다. 하나의 걱정이 또 다른 걱정으로 연결되고, 계속해서 꼬리물기 식으로 이어지는 걱정이 시작되면 한없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사람이다. 게다가 겁도 많다. 물리적인 두려움에서 오는 겁도 있지만, 심리적인 압박에서 오는 겁도 많은 사람이다.
회사 생활을 접고 프리랜서를 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걱정했던 사람은 나보다 남편이었다. 걱정 많고 겁 많은 내가 당장 내일 일도 계획할 수 없는 프리랜서 생활을 과연 견딜 수 있을지 걱정했다. 아마 말은 안 하지만 지금도 걱정하고 있을 거다. 이러다 못 버티고 주저앉을까 봐.
막연하지만 나는 내가 디자이너여서 좋다.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거기에 보기에도 좋고 쓰임새도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디자인의 행위가 즐겁다. 비록 나의 손을 거쳐 나오는 이 디자인의 행위가 때로는 헐값에 책정되기도 하지만, 가끔은 오퍼레이터가 되어 내가 만든 시안이 전혀 다른 작업으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나의 도움이 누군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게 좋다.
풍족한 올 한 해를 생각하면 감사하면서도, 어떻게 될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내년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하지만 내겐 회사 생활 만으로는 채울 수 없던 뿌듯함과 만족함이 있다. 여전히 내일이 불안하기만 한 생활이지만, 앞으로도 이 생활을 지속해보기로 마음먹는 중이다. 그래서, 프리랜서 생활을 지속하겠습니까에 대한 나의 대답은, “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