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순정을 살다 가신 어머니와 '언니'가 된 '며느리' 이야기.
열일곱 번째 책.
저자 유병숙 / 특별한서재 / 2019.04.25
아침에 목욕을 시켜드리고 어머니의 얼굴에 로션을 발라 드렸더니 싱긋 웃으며
“어휴, 좋은 냄새! 언니, 나 시집보내려우?” 하며 한껏 달뜨신다.
“멋진 할아버지 구해드려요?” 짓궂은 내 말에
“싫어. 혹시 내 신랑이라면 모를까.”
“신랑이 누구예요?”
어머니는 얼른 아버님 함자를 대며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하신다.
귀여우신 우리 어머니!
수줍은 구십 노파의 눈동자에 생전의 아버님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 17p -
역시 외로움에는 사람만 한 난로가 없었다.
마음이 추울 때는 사람을 쬐어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 37p -
어머니는 기억 중에 어렵고 힘들었던 일부터 잊어버렸다. 과거와 미래의 걱정이 사라진 현재 속에서 어머니는 어쩌면 일생 중 가장 평안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억을 잃어버리고 아니고는 기실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때도 있다. 아무리 슬픈 이야기를 해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축복이지 않을까?
(중략)
눈을 감고 꾸는 것이 꿈이라면 눈을 뜨고 꾸는 꿈이 치매라 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눈빛 너머 어머니는 오늘 또 어떤 꿈을 꾸고 계실까?
- 44~45p -
어머니가 경증환자일 때는 집에서 모셨다. 그러다 24시간 돌보기가 너무 버거워 낮에는 데이케어센터에 모시기도 했다. 점점 증상이 나빠져서 가족들이 지칠 대로 지치다 보니 환자의 자존감을 지켜드리는 게 쉽지 않았다. 겪어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모른다. 치매는 장기전이다. 가족도 숨을 쉬어야 한다.
- 50p -
아버님이 기념일에 해주었다는, 큐빅 다이아몬드 5개가 쪼르륵 박힌 금반지, 애지중지하시던 그 반지를 내 손가락에 밀어 넣으셨다.
“언니 가져요. 이제부터 이건 언니 거예요. 내가 주는 거니 잃어버리지 말아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내 손을 힘 있게 잡았다. 반지는 이제 어머니가 살아생전 나에게 남기신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힘들 때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반지를 찾아서 낀다. 어머니의 손때가 남아 있는, 생활의 흠집 투성이에 빛바랜 반지지만 언제나 든든하게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 93~96p -
죽음의 반대말은 삶이 아니라고 한다. 톨스토이는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그가 죽자, 그토록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죽음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갔다”라고 쓰고 있다. 죽음은 삶이 껴안고 있는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하루하루 무럭무럭 늙어가고 있는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 밝게 마무리할 수 있다면!
즐거운 순간들은 가슴에 오래 머문다 했다. 그런 기억들은 시간을 초월해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행복했다는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한 순간을 남길 수 있다면 죽음이 한없이 두렵거나 슬프지만은 않을 듯했다.
- 110p -
처음 만나는 진한 어둠이었다. 오랫동안 어둠에 안겨 있다 보니 이상하게도 나를 푸근하게 감싸는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사방 어둠에 갇힌 거실에서 그가 잠 못 이르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많은 것을 가졌다는 그는 혹시 그만큼의 외로움을 쌓아둔 것은 아닐는지.
- 153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