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역 패셔니스타는 나야 나!

제19화. 크롭티 입은 두강

by 도희

에취! 찬 공기가 콧구멍 안으로 훅 들어온다. 오늘따라 찬바람에 뼈가 시리다. 감기 걸리기 딱인 날씨다.

게다가 털까지 밀었으니 더 춥다. 옷이 필요하다.

엄마가 형광 연두색이 있는 조끼를 입혀 주었다.

내가 인명구조견도 아니고, 환경 미화견도 아닌데 옷 꼴 하고는.

하긴 엄마 옷 입고 다니는 것만 봐도 촌스럽긴 하지.

가만있다가는 평생 엄마가 입혀 주는 옷만 주구장창 입을 것 같아 나도 취향 있는 개임을 밝히기로 했다.

인명 구조견 같은 두강

어떤 방법을 쓸까 저녁 내내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옷을 벗어던지기로 했다.

다행히 옷이 좀 커서 목을 가볍게 비틀어 지퍼를 물어뜯으니 가슴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가슴 한쪽이 드러나 은근 섹시하긴 하지만 만족하지 않고 내친김에 세게 몸부림 쳐본다.


오호, 한방에 훌러덩 하고 벗겨진다.

등이 좀 썰렁하지만 이 정도는 참아야 내 취향이 아님을 확실히 나타낼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아빠가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다른 옷을 가지러 간다.

새 옷을 기대한 나는 폭망이다. 봄에 입었던 조끼다.

그것도 어제 입었던 조끼와 색깔 사이즈만 다른 옷. 차라리 어제 옷이 그나마 낫다.

새 거니까.

‘오늘 밤 이 옷을 그냥 두지 않겠어.’

아빠에게 나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맙다는 듯이 냉큼 조끼를 걸쳤다.

소방대원 같은 두강

저녁밥을 주고 난 후 아빠가 집안으로 들어가고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어둠 속에서 내 눈은 야생동물의 그것이다.

슬슬 시작해 볼까? 시간은 내편이다.

어제 와는 다르게 내 몸에 딱 맞는 옷이라 쉽지가 않다.

몸을 마구 흔드니 헐거워진 지퍼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그렇지 더욱 세차게 흔들어 흔들어. 거의 다 왔어.


성공이다. 이번엔 아주 아작을 내놔야지.

조끼를 벗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에 퉤퉤, 솜이 입안에 들어왔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맛을 기대했는데

아무 맛도 없다.

머리와 몸을 동시에 썼더니 급 피곤하다. 에너지 드링크 한 병 마셨으면 딱 좋겠는데~

난 승리감에 도취되어 개선장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 아빠 표정이 기대된다. ㅋㅋ

다음 날 아침 내 꼴을 보고 아빠는 한숨부터 내 쉰다.

아싸! 이번에 새 옷이겠지.

웬걸, 아빠는 뒷덜미가 다 찢어진 누더기 같은 옷을 그대로 다시 입힌다.

설마 옷이 없는 건가?

아! 새 옷이 있는 걸 확인하고 작전에 옮겼어야 했는데 성급했다. 완전 작전 실패다.

그나저나 나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 갠데 이 꼴로 산책을 나갈 수도 없고 어떡하지

엄마 닮아 급한 성질 머리를 탓하고 있는데 호랑이 제말 하면 온다는 그 호랑이 말고 엄마다.

엄마 손에 들려 있는 시커먼 저것은 무엇?


엄마는 예의 그 징그러운 미소를 띠며 등 뒤로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내 옷을 벗기고 손에 들고 있던 옷을 입혔다.

이게 뭐야? 목을 집어넣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럴 땐 엄마 힘도 제법이다.

엄마가 말했다.

“야, 더 이상 네 옷 살 돈 없어, 그래서 엄마 옷으로 네 티셔츠 만들었지롱.

이 옷 만드느라 무려 2시간이나 걸렸다 이놈아."

“역시 우리 두강인 검은색이 잘 어울리네. 시크한 도시애 같아”


‘아, 뭐래. 이게 옷이야?’


졸지에 누더기견이 돼 버렸다.

엄마의 쫄티로 만든 옷을 입은 비루한 나.


비루한 두강


망했어. 난 오늘부터 털 자랄 때까지 산책 나가지 않을래.

이월이나 초코가 이 꼴을 보면 뭐라고 놀릴까. 생각만 해도 귀가 빨개진다.


오후 산책 시간이 되었지만 의욕이 없다.

산책 갈 준비도 안 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아빠는 내 꼴이 딱한 모양이다.

서랍을 뒤적여 새 옷을 찾아냈다. 짙은 남색에 빨강과 흰색의 줄무늬가 있는 옷이다

날씬하게 보이는 데다 세련된 색감. 저거다. 득템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아빠가 옷을 들어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무래도 작아서 안 되겠네”


'안돼. 저 그 옷 입을래요.' 아빠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요즘 크롭티(배꼽이 보일 정도로 아래의 길이가 짧은 티셔츠)가 유행이라구요.

나 그거 입을래요.

나 유행에 민감한 개란 말이에요.


난 드디어 진정한 패셔니스트가 되었다.

KakaoTalk_20221108_215548357_02.jpg 패셔니스트 두강


물고 뜯고 맛본 흔적
수선 맛집 두강네


멀쩡한 옷이 없어요 ㅠㅠ





keyword
이전 18화얼마야 얼마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