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그려져 있는 캔버스를 감싸고 있는 액자. 우리는 액자 때문에 그림을 보호하고 그림을 더 깊게 감상할 수 있다. 고흐는 “액자가 없는 그림은 육체가 없는 영혼과 같다.”라고 말할 정도로 액자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사실, 액자는 그림을 보호하는 장치 이기면서도, 또 다른 아름다운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2015년, 영국 영국 내셔널갤러리에서는 ‘산소비노 액자(Sansovino Frames)’전을 개최했다. 서른 개의 화려한 액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우리는 액자의 가치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을 빛내줄 부속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기의 화가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액자를 만드는 장인들을 협력하는 존재로 바라봤다. 심지어 다빈치 보다 더 많은 돈을 받기도 한 액자 장인도 있을 정도였다.
왜 액자는 내용물인 그림보다 동등한, 혹은 더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일까? 이 그림을 한번 보자. 색채의 마술사 티치아노의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의 초상’이다. 이 그림은 산소비노 스타일(화려하고 장식적인)의 액자에 끼워져 있다. 이 액자는 르네상스기 베니치아 학파의 유명한 화가 티치아노의 그림과 맞먹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액자의 아름다움이 그림의 가치를 더욱 높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그림에 볼품없는 액자가 들어간다면, 형태가 맞지 않는 액자가 사용된다면 그림의 가치는 더욱더 떨어지게 보일 것이다. 액자가 가진 힘이다.
액자를 가리켜 프레임이라고 한다. 프레임은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자신만의 가치, 기준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그림의 형태와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액자이듯, 인간에게는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인간들의 행동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기준(Standard)은 전쟁 속 깃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나의 깃발에 모여야만 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준의 속성은 ‘강요된 모범’을 담고 있다. 기준이 없거나 약하면 삶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준이 너무 강하면 억압과 갈등 심하게 일어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라고 할 수 있다. 프로쿠르스테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악인이다. 그는 자신이 철로 만든 침대에 나그네를 눕히고, 침대에 맞지 않으면 다리를 늘리거나 잘라 죽였다. 어처구니없지만 기준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자신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면 강요하고 억압하는 모습과 말이다.
기준을 강요한 자의 최후는 한결같이 좋지 못하다. 프로쿠르스테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그대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준을 정하고, 기준에 맞게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멋진 그림을 감쌀 수 있는 액자처럼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기준을 만들고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할까?
1) 영조의 콤플렉스 그리고 ‘기준’
우리 역사 속 영조-사도세자-정조의 가족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비정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반면 사도세자는 뒤주에 죽은 비운의 왕세자가 되었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로서,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가족의 비극을 극복하며 조선을 이끌었고, 성군으로 역사에 남았다. 이들의 가족사는 ‘기준’과 ‘관계’를 생각하게 만드는 바로미터다.
이 비극의 가족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영조의 삶부터 봐야 한다. ‘기준’은 사람의 성향과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영조는 21대 조선의 왕이다. 그는 조선판 ‘사랑과 전쟁’으로 유명한 19대 왕 숙종이다. 숙종은 자기애와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왕이었다. 그와 희빈 장씨(장희빈)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영조의 이복 형 경종이다. 경종은 숙종을 이어 20대 왕이 되었으나 재위 4년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1720~1724) 경종의 죽음은 급작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리고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조는 왕이 될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노론의 강한 공세 속에서 경종은 쉽지 않은 왕노릇을 해야 했다. 몇 차례에 걸친 반격을 통해 노론의 기세를 겨우 누를 시점에 경종이 승하했다. 특히 경종의 죽음 과정이 의문스러웠다. 경종은 원래 몸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인원왕후가 수라상으로 올린 게장과 감을 먹고 곽란을 일으켰다. 몸이 급격하게 약화되자, 영조(당시 연잉군)는 무리하게 인삼과 부자(한약재의 일종)를 경종에게 처방하였다. 당시 경종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던 내의원 의원들은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영조는 밀어붙였다. 얼마 후, 경종은 급사했다. 경종의 체질과 인삼, 부자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영조는 왕이 되었다. 사람들은 영조를 가리켜 형(경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라며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은 영조가 왕이 된 지 30여 년이 지난 이후에도 계속될 정도로 영조를 괴롭혔다. 또 하나, 영조를 괴롭 하는 소문이 있었다. 영조의 출생에 관한 것이었다. 영조의 어머니는 숙빈 최씨다. 천한 출신(무수리 혹은 침방 내인, 각심이)으로 알려져 있었다. 어머니의 출신과 관련되어 아버지는 노론출신의 김춘택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떠 돌 정도였다. 어머니의 출신성분과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느덧 조선 내에서 정설처럼 퍼져버렸다. 영조는 이러한 상황에서 왕이 되었던 것이다(1724).
영조의 상황은 분명 좋지 않았다. 하지만 뛰어난 자질과 노력으로 정국을 장악하고 안정시켰다. <속대전>을 통해 법 체계를 정비하고, 청계천 정비와 균역법 실시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켰다. <동국문헌비고>등의 책들을 정리하며 국가를 체계적으로 운영하였다. 오랫동안 갈등했던 노론과 소론을 탕평책으로 묶어내고자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이 모든 뛰어난 업적 뒤에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하는 영조의 노력과 자기 관리가 숨어져 있었던 것이다. 신하들은 자신의 의견을 따라야 했고, 복종해야 했다. 그것은 자신의 업적을 통해 입증된 영조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점 그의 기준은 엄격했고, 냉혹했다.
그리고 그의 기준은 점차적으로 아들 사도세자에게 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아들 사도세자는 영조가 42살에 낳은 매우 귀한 아들이었다. 그에게 있어 사도세자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잘 이어나가야만 하는 존재였다. 영조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사도세자의 자질과도 연관되어 있다. 사도세자는 매우 영리했다. 4개월부터 걷고, 7개월에 동서남북을 구분하고, 2살 때 글씨를 쓰고, 3살 때 <효경>,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할 정도였다. 천재 중에 천재였다. 이런 아들을 보고 그 어떤 아버지가 욕심을 가지지 않겠는가?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콤플렉스도 없었다. 영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탄하게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거기다 완벽한 자질 까지!
영조는 자신의 ‘기준’을 사도세자에게 적용했다. 철저한 식습관, 자세와 태도, 공부까지 말이다. 하지만 기대는 어느 순간 어긋나기 시작했다. 영조의 ‘기준’에서 이탈해 나가는 사도세자의 모습이 하나 둘 씩, 나타난 것이다. 식탐에 빠져 12살 때부터 몸이 비대해졌다. 영조가 18세에 타던 가마는 사도세자가 타면 비좁았으며, 배가 너무 나와 넘어질 것처럼 보였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영조로서는 매우 불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공부는 등한시하며, 무예와 말타기, 소설을 읽는 것을 즐겼다. 영조의 기준과 어긋나는 왕세자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렇게 영조는 점차 사도세자를 자신의 관계 속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재수 없는 순간에만 사도세자를 부르거나, 대리청정이 이뤄지는 순간에도 사도세자를 무시했다. 사도세자는 점차적으로 영조와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영화 <사도>에 나오는 것처럼. 사도세자의 ‘기준’은 자유였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목표물이 아닌 하늘로 날아가는 ‘활’처럼 말이다. 사도세자는 방황했고, 미쳐갔다. 하지만 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의 ‘기준’을 이해할 시도 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준’에 어긋난 못난 아들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던 어느 날.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정조)으로부터 사도세자를 대체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렇게 이 가족의 비극은 정점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사도세자는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기 시작했다. 내관 100여 명을 죽이고, 아내 혜경궁 홍 씨에게 바둑판을 던지며, 어머니 영빈 이 씨도 죽이려 했다. 심지어 자신의 애첩 빙애를 죽이고,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연못에 던질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아무도 세자를 통제할 수 없었다. 때마침 나경언의 고변이 터졌다.(1762) 나경언은 세자의 비행과 잘잘못을 고변하였다. 그리고 영조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은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아모리(아무리)’ 하고 싶다고 말하며, 칼을 들고 경희궁으로 향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이 혜경궁과 영빈 이 씨에게 알려지면서, 사도세자의 운명은 정해졌다.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 씨는 영조를 찾아가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요청했다. 영조는 격분하며, 창경궁 휘령전 앞으로 사도세자를 끌고 왔다. 아침 9시부터 시작된 처분은 저녁 7시경이 되어서야 뒤주에 갇히며 끝이 났다. 사도세자는 그렇게 8일 동안 뒤주에 갇혀 지내다 아사했다.
2) ‘기준’이 강요될 때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은 철저하게 자신만의 ‘기준’으로 관계를 맺은 두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영조는 ‘철저한 관리’를 사도세자에게 강요했고, 사도세자는 자신의 ‘자유’는 중요시하면서 아랫사람의 ‘생명’은 천하게 여기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둘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둘 사이의 문제점은 우리 삶 속의 인간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영조의 ‘기준’은 흔히 아랫사람들에게 제시할 때 많이 보인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기성세대들이 ‘불성실하다고 생각하는 후배들과 어린 세대’들에게 자주 쓰는 표현이다. 사도세자의 모습은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자기만 아는 이기적은 모습의 전형이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모두 기성세대에게 넘기는 것과 닮아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힘을 가지면 후배들과 어린 세대들에게 동일하게 말한다. “나 때는 말이야!” 200년이 지난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사건이 가진 특수성도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탓하기 바빴다. 따뜻한 격려 말보다 차가운 비판을 할 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 회피하기 바빴다. 또한 자신보다 힘이 약한 이들에게는 영조보다 더 무서운 육체적 폭력으로 대할 뿐이었다. 둘 사이의 ‘기준’은 그래서 이기적이다. 자신만의 관점에서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기준’이 서로 닿을 수 없었던 이유에는 육체와 정신을 포함한 ‘소통’의 부재가 컸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나자 친모 영빈 이 씨에서 때어냈다. 그리고 옛 경종을 모시던 상궁들로 이뤄진 저승 전에 양육하였다. 영조는 아들을 평가할 때만 찾아와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가버렸다. 사도세자와의 인간적 소통의 시간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외롭게 컸다. 그리고 8살이 되던 해에 혜경궁 홍 씨와 만나 결혼을 하지만 성인이 된 시점이었던 15살 때에는 막상 영조의 계획에 의해 대리청정을 해야 했다. 이때, 혜경궁 홍 씨도 매우 불만이 많았다. 성인이 되자마자 대리청정을 시켜 두 부부가 함께 지낼 시간을 가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대리청정은 사실상 사도세자를 혼내는 자리였다. 사도세자는 무엇하나 판단할 수 없었다. 두 부자의 사이가 틀어지자, 영조는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겨 사도세자와 더 멀어졌다. 사도세자는 그런 아버지를 멀리서 바라볼 뿐, 찾아뵙지도 않았다.
이 두 부자의 소통의 부재는 공감의 부재로 이어졌다. 각자의 관심사에 대해 냉혹하게 만큼 비난을 퍼부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제대로 된 학문(성리학)만을 공부하도록 요구했지만, 사도세자는 무예와 잡학, 예술을 즐길 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자신을 이해하지 않는 아버지를 답답해 여겼고, 청심환을 먹고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어쩔 때는 영조를 보면 기절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공감의 부재는 관계의 부재로 이어졌다. 사도세자 자신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욕하고, 심지어 아모리(아무리)하고 싶다며 울부짖었다. 칼을 들고 아버지가 있는 경희궁까지 찾아가기도 할 정도였다. 영조도 마찬가지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대안(정조)을 찾은 이후로는 사도세자를 포기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새로 결혼한 정순왕후와 함께 경희궁을 거처를 옮겨 철저하게 세자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나경언의 고백, 영빈이 씨의 대처분 요청은 명분에 불과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파탄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결국 1762년(영조 38년), 영조 나이 70세, 사도세자 28세가 되던 임오년. 임오화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그렇게 뒤주에 갇혔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기준’에 맞추고 싶었던 것 같다. 사(思), 도(悼)의 휘호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면 알 수 있다. ‘사’는 세자 본인의 잘못을 후회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도’는 이른 나이에 죽은 아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조의 모습은 사도세자 죽음 이후 개선가를 울리며 환궁하는 모습에서도 잘 드런난다. 그 둘은 죽을 때까지 자신만의 ‘기준’으로 서로를 바라봤고, 관계를 단절했던 것이다.
3) 달, 그리고 정조
영조는 해와 같은 임금이다. 해의 빛으로 세상이 돌아가지만, 너무 강렬한 햇살은 생명체를 숨 막히게 만든다. 강렬한 빛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항상 존재하는 법이다. 영조가 그랬다. 영조는 백성들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훌륭한 임금이었을 것이다. 반면 사도세자에게는 뜨거운 햇살에 불과했다. 사도세자는 바람과도 같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행동하며 자유롭게 다니면서 강풍을 불어왔기 때문이다. 반면 정조는 달과 같다.
본인 스스로도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달이 모든 세상을 은은하게 비추듯, 자신의 존재가 모두를 비추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은 해와 다르다. 달이 비춘다고 해서, 가뭄이 발생하지 않는다. 어두움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는 은은함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세상을 모두 비추어 각자의 모습을 드러나게 만든다.
정조는 영조와 사도세자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은 상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의 갈등, 자신이 돋보일수록 위축되는 아버지, 기대감을 드러내는 할아버지. 결국 자신의 뛰어난 존재는 아버지를 사지로 몰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정조에게는 또 하나의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반역죄인의 아들이 그것이다. 영조는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시키고, 승정원일기의 일부분을 삭제하고, 대리청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주려 했다. 하지만 세상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모든 사정을 직접 목격했던 신하들은 더욱더 그랬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정조는 왕이 되었다. 그렇지만 정조는 영조, 사도세자와 완전히 다른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조선 전기에 세종이 있다면, 조선 후기에는 정조가 있다는 평을 받을 정도의 성군이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 사도세자와 다르게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많은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임오화 변 이후, 정조는 영조가 있는 경희궁에서 지냈다. 그만큼 할아버지 영조와 많은 대화, 교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뛰어난 자질을 바탕으로 할아버지의 ‘기준’을 이해하고, 공감했다. 할아버지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사도세자와의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려 4세대 이상 차이나는 손자를 직접 자신의 곁에 두며 소통하고자 노력했다. 혼내기보다는 칭찬하고 격려했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는 돈독해 질 수 밖에 없었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신하들을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기준’을 만들었다. 영조와는 다른 ‘기준’이다. 우리의 ‘기준’은 ‘의리’다. 각자가 가진 ‘의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리의 존중 속에서 서로에 대한 ‘인정’이 싹틀 수 있었다. 정조는 우리의 ‘기준’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각자가 가진 재능을 확인하고 드러날 수 있도록 했으며 존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수원화성이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실험적인 계획도시였다. 이 도시에 참여한 많은 관리들 뿐 아니라, 정조는 직접 수원화성의 착공에 관여한 석수들의 이름을 벽에 새겨 넣었다. 또한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에게 돈을 지급했다. 그 전까지는 국역의 일환으로 무료로 공사를 진행했던 것과는 완전 딴판이다. 높은 관리와 자신의 이름이 동시에 새겨진 수원화성을 보며, 석공은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이뿐 아니다. 규장각, 초계문신제도, 장용영을 만들어 각자가 가진 재능을 뽐낼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했다. 서얼들에게도 과거제를 응시할 수 있도록 했으며, 노비들의 신분을 해방 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정약용, 이덕부, 박제가, 박지원, 홍대용 등의 실학자들이 이때 무더기로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정조는 우리의 ‘기준’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관계를 형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대에 많은 인물들이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 스스로가 말한 달의 역할처럼 말이다. 또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정조가 어렵게 구축한 관계망의 관리이다. 정조는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경계를 분명히 했다. 이것은 영조의 배제와 완전히 다르다. 우리의 ‘기준’에 편입되지 않으려 하거나, 배척하는 이들은 철저하게 권력에서 제거했다. 즉위 초 홍인한, 정후겸, 화완옹주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조가 영조와 다른 점은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조는 우리의 ‘기준’을 통해 관계가 안정될 때, 그들을 하나 둘 씩 사면하거나 복권시켰다.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신하들에게는 개인적인 공감과 친근가을 드러내며 포용하고자 애썼다. 노론의 영수 심환지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정조는 공통된 ‘기준’이었던 자신들의 의리를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의리를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재능을 드러낼 수 있도록 했으며, 경계와 포용의 관계망을 통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뤄낼 수 있었다. 정조는 공존(연대)의 상황을 조성해서 최악의 상황을 최상의 상황으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점이 우리가 정조에서 배워야 하는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