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은 뻘짓을 해보고 싶었다.
인턴이 끝나면 중미를 여행할 계획이다. 인턴 하며 바득바득 모은 돈으로 경비를 충당할 순 있지만, 대학생 때 배낭여행처럼 먹고 싶은 거 다 참아야 되니까.. 돈도 벌면서 재밌게 여행할 수 있는 방법 없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교환학생 때 세계 각지에서 온 친구들을 내 방으로 불러 모아 푸드 파티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나는 호떡을 만들었는데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게 아니고서는 대부분 그 맛을 좋아헀다. 그래서!! 돌아다닐 때 호떡을 만들어 팔아 조금이라도 용돈벌이를 해보려 한다.
과연 중남미에서도 호떡이 먹힐지,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 테스트를 해보려고 마트에 가서 필요한 재료를 구입했다. 아. 마음이 너무 들떠서 이날 일이 손에 안 잡혔다. 계속 호떡 장사할 생각만 했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호떡믹스'를 구하는 거지만 남미에서는 찾기 어려울 듯하다. 반죽까지 손수 해야 한다. 밀가루, 쌀가루 (찹쌀가루가 없다), 이스트, 계핏가루(짱비싸다), 흑설탕, 견과류를 샀다.
블로그 레시피대로 반죽을 만들고, 1시간을 재워 놓는 사이에 호떡소를 만들었다. 호떡은 역시 시나몬 향이지! 그 비싼 계핏가루를 팍팍 넣고, 해바라기씨와 땅콩을 빻아서 곱게 만들려고 했는데 한 두어 번 빻다가 옆에 있는 믹서기를 발견하고는 씩, 미소를 지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콩이 갈렸다. 근데 해바라기씨는 갈리지가 않는다? 딱딱한 껍질 부분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입 먹어보니 질감이 좋지 않다. 그래도 열을 가하면 부드러워지겠지 라는 낙관적인 마음으로 계속한다. 견과류, 시나몬 가루, 흑설탕을 섞는다. 먹다 남은 꿀도 약간 첨부해준다. 한 입 찍어먹어 봤는데 계피향이 너무 강해 생각보다 달지가 않다.
한 시간 뒤, 반죽이 부풀어올.. 라야 된다는데 글쎄. 별 차이 없지만 되겠거니 하고 곧바로 모양을 만든다. 양 손에 해바라기유를 바르고 반죽을 떼어 내 돌돌 돌려 쫙 펴준 뒤 숟가락으로 가운데를 팍, 눌러서 준비된 호떡소를 넣어준다. 반죽이 손에 막 달라붙긴 하는데 원래 이런 거려니 하며 넘긴다. 팬을 예열하고 기름을 두른다. 반죽을 올린다. 일단 실패할지 모르니, 두 개만 만들어 보기로 한다. 올렸다. 치이이이이이이익. 정겨운 소리. 가 날 줄 알았는데 예열이 덜 됐다.
호떡을 만들 때 늘 고민. 누르개가 없는데 뭐로 누르지? 미국에 있을 땐 적당한 크기의 냄비로 눌렀다. 여기서는 평평한 동그란 국자 같은 게 있길래 그거로 눌렀는데 송송 뚫린 국자의 구멍들 사이로 반죽이 그대~로 튀어나온다. 애벌레 백 마리가 동시에 구멍을 뚫고 나오는 비주얼. 으메 징그러워. 반죽이 국자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그래서 망했다. 첫 번째 시도는 장렬하게 실패했다. 호떡 모양은 안 나왔지만 누르고 눌러 겨우 빈대떡?처럼 만들었다.
두 번째 시도. 이번에는 네모난 모양의 스뎅 누르개를 써봤다. 오. 구멍이 없어서 그런지 훨씬 잘 눌린다. 하지만 반죽은 여전히 늘러붙는다. 그래도 아까에 비하면 꽤나 성공적이다. 맛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적어도 겉모습은 호떡이었다....
맛을. 봤다. 원래는 호떡소가 꿀처럼 녹아 좔좔 흘러야 정상인데 얘네들은 녹을 생각이 없는지 고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껍질째 돌려버린 해바라기씨는 또 어떻고. 거북한 질감이.. 한입 베어 물고는 ㅎㅎ. 버렸다. 통째로. 그래 내가 무슨 놈의 호떡이야. 호떡 팔아 세계 여행이라는 야심 찬 계획을 포기하려던 찰나. 찹쌀가루 없이 계란, 버터, 우유로 반죽을 했다는 네이버 블로그를 발견했다. 이 재료들을 사서 다시 한번 시도해 봐야지. 호떡소도 다시 만들어야겠다. 꿀물이 절절 흘러넘치려면 설탕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야 할 것 같다.
처참한 실패 후 자아성찰을 했다. 그냥 가면 될 것이지 뭘 이리 부산스럽게 호떡을 굽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걸까. 호떡 좀 굽는다고 인생에 도움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냥 포기하고 적당히 즐기면 되잖아.
음... 그러기에는 뭔가 1% 아쉽다. 지금까지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니, 제도권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 늘 좋은 결과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근데 그 커리큘럼을 벗어나서 무언가를 해본 적은 몇 번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실패가 두려웠겠지. 그냥 남들 다 하는 대로 하되, 거기서 조금만 더 노력해서 기왕 하는 거 좋은 결과 내 보자. 기왕이면 좀 더 좋은 대학 가자, 학점은 기왕이면 고고익선, 동아리도 열심히, 기왕 스페인어 공부하는 거 최고를 목표로... (아. 그래서 연애는 노력을 못했나..) 생각해보면 이 마음가짐으로는 평생 경쟁사회의 일원으로 남을 누르려는 스킬 밖에는 못 배울 것 같다. 한 번쯤은 뻘짓을 할 때가 된 거다.
계획대로 찹쌀가루 대신 우유, 버터, 계란을 사다가 새로 반죽을 했다. 남미에서는 옥수수 가루를 많이 쓰니, 두 가지 버전을 시도해 봤다. 옥수수 반죽, 밀가루 반죽. 모든 재료를 투하해서 쉐킷 쉐킷, 아 그런데 옥수수 반죽은 걸쭉하다. 도무지 섞일 생각을 않는다. 밀가루 반죽은 잘 섞이긴 하는데 묽다. 결국 옥수수 반죽 절반은 버렸고, 절반은 밀가루 반죽과 섞어서 발효시켜 봤다. 씬나게 수영을 하고 돌아와 보니 옥수수와 밀가루를 섞은 쪽이 호떡 만들기에 딱 좋은 정도로 찰기가 돌았다.
호떡소도 업그레이드해 봤다. 지난번 해바라기씨 껍질을 까지 않은 채로 믹서에 돌려버린 참사가 생각났다. 이번에는 땅콩과 호두만 곱게 빻아 넣었다. 설탕의 비율을 압도적으로 높이고 시나몬 가루는 적정량만 넣었다. 이번 목표는 호떡에서 꿀물이 터져 나오는 것. 반죽을 떼어서 얇게 편 뒤 가운데를 숟가락으로 누른다. 그러면 백두산 천지 모양으로 반죽이 만들어지는데, 안쪽으로 호떡 소를 가득가득 눌러 담는다. 호떡소는 많을수록 맛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 다 집어넣었으면 반죽 문을 닫아 줘야 하는데 얼래. 너무 많이 넣었는지 백두산 폭발하듯이 양 옆으로, 아래로 호떡소들이 마구 터져 나온다. 이대로 호떡이 되긴 싫다는 최후의 발악인가.
어찌저찌 6장 정도를 구워냈다. 그중 성공적인 2장을 집주인 아저씨에게 먹어보게 했다. 밤 11시쯤. 출출하시죠? Arepa Coreana를 만들었는데 한번 드셔 보실래요?
맛을 본 파블로는 이것저것 물었다. 재료는 뭐가 들어갔냐. 반죽은 뭘로 했냐. 음. 맛있다고 말은 해주는데 표정은 영... 침을 꿀꺽 삼키며 파블로를 지켜보다가 가장 묻고 싶었던 말을 물었다. 얼마 정도 내고 사 먹겠어요? 근데 이 아저씨 꽤 오래 고심한다.(이걸 솔직히 말해 말아? 이런 표정.) 내가 다 민망해서 “돈 주고 사 먹고 싶지 않군요?”라고 했더니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어.. 아니라고는 말 안 하네..) 고심 끝에 ‘3개 1달러’라는 판결이 나왔다. 휴. 그래 이 정도면 본전 플러스 아주 조금의 알파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남은 반죽으로 다시 시도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에서와 비슷한 맛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 호떡 몇 장 굽는다 해서,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인생에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호떡을 꼭 팔아봐야겠다. 세상이 얼마나 만만하지 않은 건지, 아득바득 경쟁하며 살았던 게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몸소 깨달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