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에서 멈춘 밤
눈발이 바람에 휘날린다.
바람이 유리창을 거칠게 두드린다.
바람소리는 하늘가를 떠도는 울음을 닮았다.
끝내 들어주지 못한 말들이 바람소리로 흩어진다.
우슬님의 자리는 빈 채로 남아 있다.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실까...
고요함이 더 깊어진다.
몇 년 전 사할린에서 오신 어르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정부의 주선으로 제2의 고향을 찾아온 그분들과 3년 가까이 함께 했다.
그분들은 사할린에서 생활하시다가 70세를 넘긴 뒤 우리나라로 돌아온 분들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애타게 그리던 고향과 내 나라를 찾아와 벅찬 감동으로 머물게 된 어르신들.
우리말보다 러시아어가 더 익숙하고, 북한 교사에게 배운 한글과 말투로 시간이 흘렀어도 이곳 생활이 어색한 상태였다.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한 분들이라 가르침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한국어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사할린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한 분이 계셔서 러시아어로 부연 설명했다.
그중 한 분이 어느 날, 문해교실 문 앞으로 나를 찾아오셨다.
원래도 날씬하셨지만 눈에 띄게 야윈 몸에 눈꺼풀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어머, 우슬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내가 차가운 손을 잡고 걱정하며 물었다.
우슬님은 조심스레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제가 글을… 한글을 좀 더 배우고 싶어서요.”
우슬님은 아직 남아 있는 북한식 억양으로 말씀하셨다.
예전에도 열심히 하셨는데 글 표현이 그리 매끄럽지는 않았다.
우슬님은 마음을 털어낼 글이 쓰고 싶은데,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어르신들은 환영의 박수로 우슬님을 맞았다.
우슬님은 며칠이 지나도 어르신들과 어울리지 않고, 뒷자리에서 조용히 수업만 들었다.
늘 깔끔하고 새치름한 모습이었고, 말이 많지를 않으셔서 적응기가 필요할 듯했다.
그러나 한 달 남짓 되었어도 우슬님은 나 이외에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표정은 온화했지만 그늘진 모습은 여전하셨다.
어르신들이 다가가서 말을 건네면, 간단한 대답만 하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한 날은 우슬님이 화장실에 가신 틈을 타서 몇몇 어르신들이 말씀하셨다.
"선생님, 우릴 무시하는 거 아닐까요. 배울 만큼 배웠다면서 여긴 왜 와요?"
"시장에서 보면 저 사람들은 몰려다니며 쏼라쏼라 말해서 전혀 알아듣지를 못해요."
"우리 반에 왔으면 우리랑 어울려야지 혼자 잘난 척하는 것 같아요."
어르신들의 이런 불만과 불평은 처음이었다.
구슬옥님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씀하셨다.
"우릴 무시하면 여길 오겠어?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날 나는 우슬님과 따로 시간을 가졌다.
예전에도 우슬님의 자랑은 무남독녀인 딸 이야기였다.
모델처럼 늘씬하고 멋진 딸의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며 흐뭇해하시곤 했다.
"선생님, 미리 말하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실은 제가 지금 우울증이 아주 심해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서 글로라도 이런 마음을 쓰고 싶었어요."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우슬님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셨다. 우슬님은 한참 흐느끼시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딸이, 내 희망이 죽었어요..."
가슴에 쿵하니 큰 돌덩어리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눈앞이 아득했다.
나는 와락 우슬님을 끌어안았다. 우슬님은 또다시 어깨를 들먹이며 우셨다.
세 달 전, 딸이 사할린 병원에서 돌아와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단다.
50세를 갓 넘긴 미혼의 의사였던 딸.
정신없이 사할린으로 달려가 딸의 장례식을 치른 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몸뿐 아니라 마음이 음식을 거부하고 있었다.
뒷정리하기 위해 사할린에 오가며 국경을 넘을 때마다 슬픔이 겹겹이 따라왔다.
우슬님은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꼼꼼하게 적고 따라 읽었다.
연필을 쥔 손은 가냘펐지만, 글씨는 힘 있게 또박또박 쓰셨다.
표현이 좀 서툰 부분을 짚어주며 나아질 거니까 괜찮다고 하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제대로 배워서 이 마음을 꼭 한글로 표현할 거예요. 잘 쓰고 싶어요.”
생전에 딸은 엄마가 한글을 새로 배운다니까 참 좋아했단다. 한글로 글을 쓰고 러시아어로 옆에 번역해서 편지를 보내면, 한글이 이렇게 예쁜 글씨냐며 감탄하곤 했단다. 자기도 나중에 한글을 꼭 배우고 싶다며 우슬님을 자랑스러워했단다.
사할린의 우리 동포 3세들은 대부분 한글을 배우지 못하고 러시아어로만 생활한다고 했다.
이제 한글은 우슬님에게 공부가 아니라 출구였다.
울 수밖에 없는,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대신 내보내는 작은 문이었다.
우슬님은 하루에 한 줄씩, 한 문장씩 꾸준히 그 문을 정성껏 밀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우슬님은 반 어르신들께 자신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풀어놓으셨다. 어르신들은 한숨을 쉬고 눈물 흘리며 위로하고 이해했다.
십여 년 전, 40대 중반의 딸을 먼저 보낸 구슬옥님은 우슬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부모는 땅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대요. 힘들겠지만 이겨내는 수밖에 없어요."
구슬옥님은 눈물을 닦았다.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우슬님은 점점 마음을 열었다.
어르신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궁금해하시는 사할린에서의 생활상도 들려주셨다.
어르신들은 '멋쟁이 친구'라면 우슬님을 좋아했다.
계절이 두 번 바뀔 무렵, 우슬님은 더 이상 수업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사할린과 러시아에 오가며 딸의 채 해결되지 않은 일들을 해야 했고, 호흡기가 많이 약해져서 정기적인 외출이 쉽지 않았다.
마지막 날, 어르신들은 몹시 섭섭해하셨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언제 또 봐요?"
"밖에서 만나면 내가 먼저 아는 척하며 반가워할게요."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또 와요."
“네. 친구들 고맙습니다, 잘 지내세요. 선생님, 글을 더 배워서 참 좋았습니다.”
나는 우슬님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했다.
이 교실이 우슬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낫게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였기를 바랐다.
우슬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자꾸 뒤돌아보았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어딘가에서, 딸의 이야기를 천천히 써 내려갈 우슬님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