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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Apr 17. 2021

짧은 글(이동영의 단상-5)

브런치에 안 어울리는 짧은 글 시리즈 5

#01
시간 지나가면 별 거 아닌 일들에 매몰되지 말자.
감정이 일렁일 때마다 이렇게 되뇌자.

지나갈 일이야.
별 거 아니야.
내 인생 통틀어서 별로 안 중요해.


중요한 일이었다면 벌써 잘 되고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하자.

가끔 이 이미지가 희망고문을 일으킬 때가 있는데,

아닌 건 아닌 거다. 이게 끈기의 문제로 보이는가, 아니면 운의 문제로 보이는가? 그나마 이루고픈 꿈에 '재능'이 어느 정도 있다면 예외다.

이글에서 재능이란 '타고난 끼(센스) + 기회를 잡을 부단한 준비 + 운이 닿을 때까지 버티며 나아가는 힘'을 말한다.

겉보기엔 마치 '역주행'처럼 보이는 고생고생 후 '대박' 사례도 더러 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은
경우가 다르다.


 말도 많지 않은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 없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랴'

실제로 도끼로 찍어 나무를 넘겨본 사람은 안다. 열 번을 넘게 도끼로 찍어도 튼튼한 나무는 전기톱을 사용해야 하고, 열 번을 찍는 동안 나무의 변화가 상처 아닌지도 살펴봐야 한다. 나무가 짝사랑 상대의 은유라면 '상처'뿐만 아니라, '실망'도 문제다.

재능만큼이나 도구(기술)와 속도(경쟁우위)와 현 위치(분수 인정-출발지점) 파악과 방향(달성 목표와 최종 목적)도 모두 운에 다가가는 요소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고? 골이 들어가도 골키퍼는 교체가 잘 안 된다. 신이 축구감독이라면, 골키퍼를 교체하는 결단에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다. 한 골 먹은 게 결정적인 골을 못 막은 실수이거나 그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었다면 몰라도, 교체 원인이 되긴 어렵다. 리고 교체가 된다고 해도 그게 당신이라는 보장은 없다.


정신을 온통 거기에 빼앗기고 나면 손해 보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다. 좀 더 섹시해지고 싶다면 상대의 눈치를 살피기보다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착각은 결핍에서 온다. 관계의 맥락 이미 난 마음을 접었는데 다른 결핍이나 방어기제 때문에 저 사람 끌린다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쯤 되면 눈치껏 물러나야 한다. 쪽팔려도 할 수 없다. 타이밍을 놓쳤다. 관계는 타이밍이다. 집착과 직진을 구별하자.


#02.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기보다
우선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해서
불행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럼 자연히 환경적인 세팅이나 나를 감싸도는 긍정의 기운에 힘입어, 좋아하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된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03.

나는 선천적으로 태어나기를 누군가에게 날 맞추는 걸 질색하는 경향이 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노력하는) 몇 사람만 가까이에 두는 이유이다.

이기적이란 말을 그럴듯하게 표현한 거다.

매번 수많은 수강생과 모임 참가자를 살갑게 만나도 가까워지는 일이 거의 없는 이유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인간 사이에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필요하다. 문제는 그 기준을 높게 잡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사회적으로 직책이 높거나 콧대가 높거나 나이에 새겨진 숫자가 높은 경우가 해당한다. (혹은 예외적으로 서로 익숙해진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거리를 둘 타이밍이 온 것이다.) 이런 사람들과 더 가까워질 일이 없다 보니 내가 개천에서 용 날 일도 없고 크게 새로운 사람들과 부대낄 일도 없다.

철이 들면서 조금은 알 것 같다. 많은 사람을 상대할수록 침묵이 필요하다고. 시간이 내게 가르쳐준다. 침묵은 그저 입을 스스로 막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불필요한) 마음을 정제하는 것이라고.


#04.

우리는 각자 모두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이 저 퍼즐 조각처럼 처음부터 전부 '딱 들어맞을 일'은 없다. 어쩌다 우린 운명 같다라며 초반에 잘 맞는 것은 수많은 피스 중 두 개이고, 앞으로는 하나하나 맞춰 나가야 하는 운명인지도.


아니면 어느 한쪽이 상대방을 위해(상대에 맞춰) 최선을 다해 깎이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퍼즐처럼 딱 맞는 일은 불가능하다. 맞지 않아야 정상이다. 모양이 서로 '맞도록 달라서', 이 세상과 인생이라는 퍼즐판에 딱 들어맞는 경우가 처음엔 가능할지 몰라도. 그 조각은 시작이었을 뿐 전부가 아니란 말이다.


인생이 겨우 각자 한 두 조각의 모습으로 판단하며 함께 사랑을 나눌 판이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사랑을 한다면(결혼, 우정, 사회적 관계도 마찬가지다) 기꺼이 자기 자신이 깎여도 된다는 허용이 있어야 한다. 상대의 모양에 따라서 말이다. 달라서 잘 맞는 것이지 같은 모양은 같은 자리를 두고만 다툴 뿐이다. 내 모습만 고집부리면 상대가 깎이면서 겪는 고통은 오로지 상대의 몫으로만 돌리는 셈이다.


그건 만남을 지속하기 위한 운명적 노력이기에 정말 계속 관계를 원한다면 맞춰 가야 맞다. 그러나 너무 다른 모습으로 서로 맞춰주기를 강요한다면? 함께 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이 거대한 세상이라는 판에- 거창하지만 단순한, 운명 혹은 인생이라는 판에- 서로가 딱 들어맞는 모습으로 완벽하 바라는 미련한 생각이다.


처음에 잘 맞았으니까 희망을 갖고 하나씩 맞춰 나가는 재미여야지, 왜 우린 처음처럼 맞지 않냐며 서로를 원망하면 그 관계는 끝이 선하다.


#이동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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