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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랑 Oct 05. 2023

빠른 년생의 치욕

태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이는 중요합니다.

아이들 사이에도 권력이 존재합니다. 그 권력에 비굴해지는 아이가 있고, 굴복하지 않고 당당한 아이도 있겠지요. 저는 소심하고 비겁한 아이였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나이는 중요합니다. 나이를 겨우 10개도 갖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죠. 이미 몇십 개고 나이를 가진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무게입니다. 특히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에게 나이의 질서는 선명합니다.


초등학교(아차, 국민학교)에 입학하자 60명 남짓한 아이들이 한 반에 모였습니다. 생일 순으로 남자아이들부터 시작해 여자아이들까지 번호가 매겨졌습니다. 번호의 기준은 생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의 생일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적은 나이임에도 동등한 대우를 받는 빠른 년생들을 추적했습니다. 저는 추적할 필요도 없이 빠른 년생임이 발각되었습니다. 저는 1학년 4반의 가장 마지막 번호, 59번이었으니까요.



“왜 너는 언니라고 안 불러?”


같은 반 아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유치원 때는 받아본 적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연히 같은 반이면 친구가 아닌가요? 어떤 아이들에게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렇게 저를 동갑내기 친구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당시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그랬을까요? 아이들 사이의 평가 기준은 부모님이나 사는 곳보다는 아이 자신의 능력치였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받아쓰기를 곧잘 했습니다. 쪽지 시험 성적도 괜찮았어요. 그러나 체육은 영 아니었습니다. 또래에 비해 몸이 덜 크기도 했고, 몸 쓰기에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러니 태생적인 부분인가 봅니다. 여하튼 이런저런 능력치가 더해지고 빠져서 합격선에 닿았는지, 저는 아이들에게 무시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쉬는 시간마다 반 아이들과 재밌게 놀았습니다. 아이들은 손과 몸이 작은 제게 동생들이 하던 깍두기 역할을 주었습니다. 공기놀이, 고무줄, 오재미.. 모든 놀이에서 저는 깍두기였습니다. 저희 동네 깍두기는 모든 편에 소속됩니다. 그러니 어느 편이 이기던 제가 이긴 것이고, 어느 편이 지던 제가 진 것이었습니다. 제게 놀이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승부욕이 적은 사람인 것도 이런 경험 때문인 것 같네요. 아무튼 그때까지도 저는 반 아이들과 잘 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름 방학이 지났지만 아직 더웠을 무렵입니다. 반팔을 입고 있었으니까요. 아직도 기억나는 속눈썹이 길었던 아이, 장미가 떠오르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수업 시간에 제 등을 톡톡 두들겼습니다. 그리고는 예쁘게 속삭였습니다.


“애들이 너랑 놀지 말래. 하지만 난 네가 좋으니까 너랑 놀 거야.”


저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등을 살짝 젖히고 물었습니다.


“왜 놀면 안 되는데?”

“넌 우리보다 어리니까 친구 하면 안 된대.”


서운하다는 감정을 모를 때였습니다. 그저 그 말에 조금 답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이후로 점점 아이들과 함께하는 놀이가 줄었습니다. 결국에는 깍두기는 놀이에 참여할 수 없는 규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노는 대신에 교과서와 책을 읽었습니다. 바른 생활과 슬기로운 생활을 읽고, 학급 책장에 있는 책을 읽고, 학교 도서관의 책을 읽었습니다. 다행히 책 읽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아파트 놀이터에 친구들이 잔뜩 있었는걸요. 쉬는 시간에 놀 친구가 없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장미꽃 같은 아이는 저를 계속 챙겼습니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의 눈치가 보이는 쉬는 시간 대신에 수업 시간에 놀았습니다. 자리가 가까울 때는 속삭였고, 자리가 떨어져 있을 땐 쪽지를 보내며 놀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기꺼이 쪽지 전달을 해 준 아이들이 고맙네요.



초등학생들은 겨울 방학이 지나면 봄방학까지 짧게 등교를 합니다. 봄방학 전의 추운 날이었어요. 한 아이가 운동장 뒤편 나무 벤치로 저를 불렀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저와 놀지 못하도록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죠. 그 아이가 벤치 위로 올라가길래 저도 따라 올라갔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늦겨울의 바람만 가득한 운동장에서 벤치에 올라선 두 아이는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그림입니다. 


저보다 훨씬 키가 컸던 그 애가 말했습니다.


“2학년이 되면 우리랑 놀게 해 줄게.”


그 아이의 얼굴은 차가운 바람으로 붉었지만 표정만은 온화했습니다. 그 애는 아량을 담아 덧붙였습니다.


“대신 장혜미랑 놀지 마.”


수업 시간에 저와 함께 놀던 장미꽃 같은 아이의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습니다. 사실 뭐라고 대답한 것 같긴 한데, 부끄러운 기억인지 사라졌네요.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관계를 고려하여 반 배치를 하신다고 합니다. 당시 선생님들도 제 교우관계를 고려하셨겠죠. 2학년이 되자 저와 놀지 않던 아이들과 다른 반이 되었습니다. 혜미와도 다른 반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복도에서 마주쳤지만 우리 사이에는 인사조차 없었습니다.


2학년 10반이 된 저는 여자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덕분에 부반장도 했지요. 남자애들만 제게 오빠를 강요했지만 으레 있는 어린이 성별 싸움의 일환이라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다만 운동장에서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왜 제게 다정했던 아이를 적대하는 말을 들었는데도 화내지 못했을까요? 혜미는 그날의 대화를 전해 들었을까요? 왜 저는 약하고 비겁했을까요?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등을 살짝 두들기는 혜미의 속눈썹과, 치욕스러운 운동장의 겨울이 또렷합니다.




만약 제가 그 운동장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저와 놀고 싶지 않은 아이들에게 놀아달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압적으로 저와 놀아주겠다는 제안을 수락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구나 저를 좋아해 준 아이와 놀지 말라는 요구는 명확히 거절할 명분이 있습니다. 


저는 운동장에서의 제안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죠.


“네가 나랑 놀지 않는 건 너의 자유야. 하지만 미혜와 놀지 말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돼. 그건 나의 자유이니까.”


이렇게 당당히 제 입장을 밝혔다면 도망칠 이유도 없습니다. 그 자리를 매듭짓고 떠나겠지요.


“이야기가 끝났으면 추우니까 들어갈게.”



그때의 기억을 날조합니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제가 빠른 년생이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상관없이 저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아이들 앞에서든 제 입장을 떳떳하게 밝혔답니다!



저는 당당한 아이였다고 기억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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