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싸우는 모든 분들께..
돌이켜보면 평생 잊지 못할 해가 많진 않습니다. 과거는 뭉뚱그려져 선으로 남습니다. 그나마 제 머릿속에 또렷하게 점으로 남아 있는 해가 있다면, 월드컵 4강을 갔던 2002년, 고3이 되었던 2012년, 입대를 했던 2018년, 전역을 했던 2020년, 결혼을 했던 2022년, 이 정도입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사건이 있었겠지만, 제 머리는 모든 일을 선명히 기억할 만큼 좋지 않습니다.
2025년은 평생 잊지 못할 한 해였습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는데, 림프종이라는 암을 만났습니다. 그 후, 제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매일 아이들을 만나던 학교를 휴직했습니다. 2주마다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찰랑거리던 머리도 완전히 빠져 대머리가 되었습니다. 매일 같이 달려도 끄떡없던 심장이, 걷는 것만으로 숨이 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술도 더 이상 마실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내가 죽는 건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좋아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돈도 벌지 못하게 되었고, 병원에 가는데도 아내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쓸모없다는 사람이 됐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암 환자가 되고 ‘나는 누구인가?’ 고민했습니다. 나를 규정하던 모든 것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동안 내 직업과 취미가 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교사다.
나는 읽고, 쓰고, 달리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치료를 받는 동안 나는 더 이상 교사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힘드니 읽을 수도, 쓸 수도, 달릴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교사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읽고, 쓰고, 달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저 ‘암 환자’ 일뿐입니다.
언젠가는 저도 ‘암 환자’에서 벗어나게 될 겁니다. 그땐 ‘암 환자’라는 단어도 나를 설명할 수 없게 되겠죠. 그땐 다시 나를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변화하는데, 변하지 않는 ‘나’는 없을까요? 이 책은 그 질문에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입니다.
암 병동에서는 희망보다 절망을 더 많이 목격합니다. 왼쪽엔 통증에 비명을 지르는 할아버지가 계시고, 오른쪽엔 백혈병에 판정을 받고 좌절하는 청년이 있는 곳에서 ‘희망’이란 얼마나 공허한 말이 던지요. 다만 제 경험이 누군가에게 절망과 싸울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에겐 수없이 많은 절망이 찾아올 겁니다. 그때마다 이 책을 떠올리며 꿋꿋하게 싸우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절망과 싸우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