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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케이 Sep 05. 2022

이러다 미칠지도

결단을 내려야 해

"격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죄송합니다.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고객인 대기업 IT 본부의 X과장은 영업 대리인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전화통화에서 그가 말한 대부분은 "시간이 없어서 힘들다. 다음에 보자." 뭐 이런 식이었다. 여러 날을 설득해서 겨우 약속을 잡았지만 나는 세 시간을 로비에서 기다리게 했다. 지난주 다른 고객사에서 두 시간을 기다리고 못 만나고 왔는데, 그래도 오늘은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영업은 이 정도의 인내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여의도 금융사 로비에서의 나의 모습은 초라했다. 영업 5년 차에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좌절감이 밀려들었다. 전반적인 경기가 좋지 않아 잠재 고객들은 대부분 영업사원을 멀리하는 듯 느껴져서 내 자리가 더욱 불안했다. 



세 시간 기다린 끝에 만난 그는 불편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과장이고 당신은 영업대리인데, 너무 격에 맞지 않나요?" 아니 뭐 약속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약속하고 세 시간이나 늦게 나온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지?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할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그저 착각이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일반적이지 않고 나 같지도 않다). 오래 기다린 내가 미안하고 감사하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 뭐 X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얼굴 표정을 정리하고 제품 소개를 해야 한다. 이게 오늘 나의 업무니깐. 노트북을 꺼내서 장시간 준비했던 제품 소개와 지원 전략 등을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 생각하고 꼼꼼히 설명했다. 그는 핸드폰을 보면서 전화도 하고, 나의 설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비매너! 그렇게 제품 소개가 끝나고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X 같네. 이래서 영업은 어려운가 보다. 아님 내가 아직 괜찮은 영업이 되지 않았거나..

  

 "고객사 과장에 전화받았어.
무례했다고 하던데. 좀 잘하지"


사무실 복귀 후에 팀장은 내 얘기를 듣지도 않고 대뜸 나를 비난했다. 고객 잃는 거는 영업에게 치명적인데, 나 때문에 고객을 잃을 수 있다고 잔소리를 하고 또 하네. 이게 팀장 맞나?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은 하고 다음 진행에 대해서 함께 논의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해할 것도 아니고, 뭐 바랄 것도 없으니.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몰라. 될 대로 돼라.. 그리곤 한강에 가서 캔 맥주를 마셨다. 누가 보면 양복을 근사하게 빼입은 젊은 백수로 봤을 것이다. 이렇게 땡땡이치는 게 달갑지는 않은데, 오늘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냥 돈이라도 많은 백수로 봐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요즘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경기가 좋지 않고 회사 사정도 더 어려워지니 이런 상황은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고객들은 더 난폭(?)해지고 사내 리더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랫사람을 더욱 밟을 것이다. 숨이 막히지만 지금 시기가 딱 그런 시점이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맡고 있는 사업 영역에서의 고객은 더욱 냉정하게 영업사원을 무시할 것이다. 그리고 팀장이나 영업 본부장은 고객의 입장에서 고객을 보호할 것이다. 회사라는 울타리도 리더의 버팀목에도 기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말 크게 다짐하고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영업 대리인 나는 점점 고립될 것이다. 이기더라도 지쳐갈 것이다.


'나는 고객이 되어야 할까?
더 버텨서 팀장이 되어야 할까?'


이직을 해야 하나? 영업을 그만두고 다시 엔지니어가 되어야 하나? 마땅히 이것들도 최선의 선택지는 아닌 듯하다. 고객과의 미팅이 점점 어려워지고 사내 리더들에게 배울 점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나의 머릿속 생각은 점점 확대되고 구체와 되어갔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져 잠도 못 자고, 온몸에 피부 알레르기가 일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버티고 있는데, 영업본부장의 한마디에 나의 고민은 모두 정리되었다. 

"박 대리. 요즘 일처리가 예전 같지 않네.."



 '그럼요. 예전같이 하다가는 아마 미쳐 버릴지도 몰라요.' 창업을 하자! 좋은 리더가 되고 가능하면 내가 제안하는 나의 가치와 내가 취급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상식적으로 판단해 주는 고객만 만나도록 하자. 이렇게 창업을 하게 될 줄은...



영혼을 갈아 넣고 영업을 영업 주니어 시절에 자존감이 무너져 고민했던 당시 일기를 돌아봤다. 창업을 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아니겠지만, 구체적으로 창업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한 달가량 아프고 자존감이 무너져 우울증세가 점점 심해졌던.. 아주 어렵고 외로웠던 시기였기에 지금도 기억이 뚜렷하다. 


아직 내가 훌륭한 리더이자 고객은 아니겠지만, 그때 그 시절 나의 모습과 아픔을 항상 기억하고자 한다. 회사가 리더가 울타리와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내가 더 성장하고 커가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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