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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장 Jun 02. 2019

[초단편소설] 어째 느낌이 안 좋긴 합니다만

유품으로 성인용품을 남기게 될 것인가

“오늘이 자네의 마지막 날이니 잘 보내도록 하게”


조금 전에 들은 말이다. 탑골공원 근처였다. 출근길에 바삐 발을 옮기고 있었다. 30미터 정도 앞에 있는 노인이 보였다. 개량한복을 입고, 사극에 나오는 배우처럼 수염을 기르고, 희끗한 머리는 길러서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고 있었다. 도인처럼 보이는 외모였다. 노인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비켜 가려고 방향을 살짝 틀 때마다 노인도 틀어서 우리는 계속 마주보고 거리를 좁혔다. 노인은 시선을 내 얼굴로 고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완전히 마주쳐서 두세 발자국 사이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을 때 노인이 한 말이 저것이었다. 


이 동네에 마음이 아픈 분들이 많으니까 그 중 한명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다. 코웃음을 흘리며 노인의 옆으로 비켜 지나쳤다. 직장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노인의 말이 자꾸 신경 쓰인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진짜면 어떡하지’ 

‘신이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고 은총을 베푼건데 내가 모른척 하는거면 어떡하냐고’

‘아! 젠장 집에 성인용품 있는데!’


나도 좀 정상은 아닌 것 같긴 한데, 기본적으로 오늘 죽는다는걸 의사한테 들은 것도 아니고, 길에서 제 정신인지 알 수도 없는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보니까 희한한 포인트가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 집에 서랍장 위에 올려둔 성인용품. 이게 지금 제일 걱정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말로 내가 오늘 죽었을 때 집에 있던 성인용품이 내가 남긴 유품이 되는 것이다.


“이게 뭐야?”

“그러게 이게 뭐지?”

“헐 성인용품이네”

“아니 뭐 이런 것까지 쓰면서 자위를 해야되나?”

“하하하하” 


누군가가 이런 대화를 할 것 같고 말이다. 그동안 선비인 척하면서 살아왔는데, 죽고나서의 이미지가 자위맨이 될까봐 무섭다. 나는 그냥 기왕 자위할 때 손을 쓰지 않고 도구를 활용해 수준 높은 퀄리티로 하고 싶었던건데 말이다. 


‘허 참. 정신나간 노인네 때문에 별 생각을 다 하는구나’

‘그냥 생각난 김에 지금 집에가서 버릴까’

‘오늘 할일도 많은데’

‘근데 영 찝찝해서 말이야’

‘물론 그 노인 말을 믿는건 아니야. 근데 또 혹시 모르잖아’ 

‘그래. 다녀와야겠어’ 


휴대폰을 꺼내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어컨을 켜고 나와서 다시 끄러 집에 다녀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팀장은 탐탁치 않은 말투로 다녀오라고 했다. 그 말투에 마음이 급해진다. 일단은 다녀오기로 했으니 뒤돌아서 다시 종로3가로 발길을 옮긴다.


저 앞에 횡단보도가 녹색으로 점멸하고 있다. 세로로 늘어서있는 역삼각형은 세칸 밖에 남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그냥 뛰어서 횡단보도를 건너기로 마음 먹는다. 진입하기 한 발자국 전 빨간불로 바뀐다. 차선신호가 녹색이 됐다. 괜찮겠지? 나는 그대로 횡단보도로 진입한다. 


"쿵!"


뛰어 들어오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녹색신호에 급출발 한 승합차와 충돌한다.

몸이 공중에 붕 뜬다.


큰 사고를 당할 때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더니 거짓말이다. 몇 미터를 나가떨어지고 있는 내 머릿속엔 온통 집에 있는 성인용품에 대한 생각뿐이다. 아휴 그냥 손으로만 할걸. 더 큰 만족 찾다가 자위맨으로 인생 마감할 줄은 몰랐네.


신이시여. 정말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까. 어째 지금 머리부터 떨어지고 있는게 느낌이 안 좋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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