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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장 May 07. 2018

[단편소설] 정관수술 하는 날

미혼의 딩크족, 정관수술 하러 가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일을 실행에 옮기는 날이다. 정관수술을 하러 가고 있다. 결정을 하기까지 쉽진 않았다. 미혼이라는 점이 나를 가장 고민하게 했다. 혹시 나중에 정말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꼭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하면 어쩌지. 하지만 수년을 거치며 수백번을 생각해본 결과, 결론은 항상 같았다. 그래도 하는게 낫겠다. 나에겐 이것이 합리적이다. 그렇게 결심했어도 스스로 고자가 되러 가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다. 


병원이 있는 건물의 지하주차장에 차를 두고, 5층으로 올라갔다. 비뇨기과의 문을 열었다. 문에 걸려있는 방울이 딸랑 소리를 내며 울렸다. 문을 열자 정면에 보이는 시계는 9시 55분을 가리키고 있다. 5분 일찍 도착했다. 비뇨기과는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를 하고 있다. 프론트에는 여자 간호사인지 직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앉아 있다. 수술 때도 여자 간호사가 들어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된다. 


10시였던 예약시간과 예약내용을 확인하고 소파에 앉으니 갑자기 손에 땀이 확 맺힌다. 난 딩크족이야. 난 아이 안 가질 거야. 나는 결혼은 오케이, 자식은 노 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이제 영원하고도 거의 확정적인 무자식의 인생으로 바뀌는 전환점을 맞이 하자니 긴장이 된다. 


최지훈님, 들어가세요.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일어나서 의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의사가 진료차트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정관수술 예약을 확인시켜 줬다. 


“네. 상담받고 가능하면 바로 수술까지 했으면 합니다” 내가 말했다.

“네네. 전화 주셨을 때 수술할 의사가 있다고 알려주셔서, 수술시간까지 비워 뒀습니다. 아이는 있으세요? 의사가 기계적으로 물었다.

“딸 하나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와이프도 그렇고 하나면 충분하다고 얘기가 나와서, 이렇게 오게 됐네요.” 거짓말이다. 미혼이라고 하면 정관수술 안해주는 곳이 많다고 하여, 미리 대답을 생각해 뒀다. 


“본인과 아내분 둘다 확실히 앞으로 추가로 자녀계획 없으신거죠? 나중에 복원수술이 가능하긴 한데, 복원수술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이 임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아주 낮습니다” 의사는 나중에 문젯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은 듯 힘주어 말했다.

“네. 자녀계획 확실히 없습니다” 나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 그럼 정관수술 설명 좀 드릴게요. 요즘에는 인터넷에서 많이 찾아보고 오셔서 대부분 알고 오시지만. 요즘에는 칼을 쓰지 않는 무도정관수술로 합니다. 정관을 묶는다고 많이 알고 계시는데, 요즘에는 자른다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의사는 책상에 놓인 모형을 볼펜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고환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정관을 꺼낸다. 정관을 자르고, 잘려진 양쪽을 봉합하고 절개 부위는 소작한다. 이게 요점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다 봤던 내용인데, 막상 의사 설명을 들으니까 겁이 나서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몇 년을 고민하고 오늘 여기에 오게 됐는데. 


“네. 잘 알겠습니다” 내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 있다. 

“네, 그럼 바지 벗고 저쪽에 한번 누워 보시겠어요?” 의사가 눈으로 간이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요?” 

“네. 수술전에 수술이 가능한지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속옷까지 같이 내려주세요” 


간이침대에 엉거주춤 누워서 바지와 속옷을 발목까지 내렸다. 의사가 와서 손가락으로 정관의 위치와 상태를 확인했다. 낯선 남자에게 내 성기와 고환을 살펴보게 하고 있자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뭐하는 짓이긴? 정신차리자. 나는 아이를 원하지도 않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정관수술을 하러 왔다. 오늘은 목표를 이루고 간다. 


의사는 장갑을 벗으며 별 문제없이 수술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수면마취를 할 것인가, 국소마취를 할 것인가를 그가 물었다. 두 방법 모두 아프지 않지만, 국소마취의 경우에는 정신은 깨어있으므로 자신의 생살이 잘려지는 느낌이 들 수 있고, 이것이 불편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나는 수면마취를 택했다.


의사는 20분 뒤에 수술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진료실을 나서니 남자 간호사가 다가왔다.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복도 끝에 있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드라마에서 보던 대형병원 수술실에 비하면 아담했다. 아주 연한 녹색으로 벽이 페인트칠 된 수술실이었다. 한쪽 벽면에 놓인 하얀색 장식장에는 작은 수술도구와 약품들이 놓여 있었다. 수술 부위를 화면으로도 볼 수 있게 하는 모니터도 있었다. 


수술 테이블은 특이하게 생겼는데, 침대처럼 한 덩어리가 아니라 양팔과 양 다리를 벌리고 누울 수 있도록 각 부분이 벌어지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모든 병원이 이런 수술 테이블을 쓰는지, 비뇨기과만 수술부위의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인지 궁금했다.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탈의실에서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후 수술 테이블에 누웠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콘돔이 없어서 섹스를 하지 못한 일, 오늘은 안전한 날이라고 해서 콘돔없이 했다가 한달간 아이가 생기면 어쩌나 두려워 했던 일, 섹스 중에 뭔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보니 콘돔이 찢어져 있었던 일, 그래서 약 한달을 조마조마 했던 일, 그후로 조금만 느낌이 이상해도 콘돔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가 물을 채워 확인했던 일, 여자친구가 생리 할 때가 지났다며 걱정했던 일, 한참 전희를 즐기다가 콘돔 비닐을 벗기고, 방향을 확인하고, 음경에 착용할 때의 어색하면서 숨소리만 들리던 시간들. 


이제 모두 안녕. 나는 이제 무자식의 세상으로 간다. 


한편으로는 수술하고 난 뒤의 상황도 상상했다.  

오빠 난 콘돔 없이는 안 해. 난 정관수술 했어. 응? 결혼도 안했는데 정관수술 했다구? 애도 없잖아? 응, 난 무자식으로 살기로 결심했거든. 결혼해도 딩크족으로 살거야. 

여자들이 믿어줄까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간호사가 제모를 하겠다고 한다. 수술복 바지 앞부분의 덮개를 젖히자 성기가 드러났다. 간호사는 수술대의 다리 놓는 부분을 살짝 벌렸다. 내 다리도 벌어졌다. 간호사는 전동이발기를 들고 무표정한 것인지 신중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환과 음경 근처에 있는 음모를 꼼꼼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손에 나의 성기를 이렇게 온전히 내어준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운 나에 비해, 간호사는 내가 사람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컨베이어 벨트 위의 자동차를 조립하는 사람처럼 제모를 진행했다. 


제모를 마친 간호사는 제모가 된 곳에 소독약을 흠뻑 발랐다. 그리고 나서 팔과 다리를 고정하겠다고 했다. 이유를 묻는 나에게 그는 수면마취해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안전한 수술을 위해서는 꼭 고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양팔과 양다리를 수술 테이블에 고정시켰다. 나는 성기를 훤히 내놓은 채로 무방비의 상태가 됐다. 간호사는 마지막으로 팔에 정맥주사 바늘을 꼽았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간호사가 나갔다. 긴장으로 심장박동수가 빨라진다. 


이삼분이 흘렀을까. 진료실에서 상담을 했던 의사, 제모를 했던 간호사, 그리고 아까는 못 봤던 간호사 한 명이 들어왔다.  


“최지훈님 수면마취 준비하겠습니다. 팔을 이쪽으로 주세요.” 못 봤던 간호사가 수면마취 준비를 했다. 정맥주사바늘이 꼽힌 팔에 마취제가 담긴 주사기를 연결했다. 


“최지훈님, 마취 들어갑니다” 



정신이 돌아오고 있다. 슬며시 눈을 떴다. 수술은 끝난건가? 몽롱하다. 팔다리는 왜 아직 묶어 놓은거야? 


“아이고, 일어나셨어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명의 남자가 수술대 옆 간이의자에 검은색 수트를 입고 앉아있다. 갑자기 수트로 왜 갈아 입었지? 


나는 수술이 끝났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남자가 시작도 못했다고 대답하고는 킥킥 웃었다. 옆에 남자도 따라서 소리내며 웃는다.


엇? 근데 이 사람들 수술실에 있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봤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기절했는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어이! 당신들 뭐에요? 이 사람들 이거 당신들이 한 일이야? 경찰 부를거야!” 내가 소리질렀다.

“흐흐흐흐. 네네. 어디 한번 불러보세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마른 체격의 남자가 대답했다. 그 옆의 퉁퉁한 남자는 50대 초반으로 보인다.  


“당신 정관수술 시작되기 직전에 겨우 도착해서 막았어요. 우리 제 시간에 오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50대 남자가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볼과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것들이 둘 다 미쳤나. 나와 의사가 모두 동의하고 하기로 했는데, 니들이 왜 나를 막아? 


“내가 동의하고 의사가 수술에 동의했는데, 당신들이 무슨 수로 막아요!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소리를 지르며 팔과 다리를 세게 움직였다. 수술 테이블에 꽉 묶여 있어서 덜컥덜컥 소리만 날 뿐 팔과 다리를 뺄 수 없었다.  


“최지훈씨 당신 결혼도 안했고, 그리고 애도 없는데 정관수술하러 온거잖아.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하루도 쉴 수 있는 날이 없어요. 지역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매일, 매주, 매월 전국 방방곡곡 비뇨기과를 들쑤시고 다닌다고.” 40대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훈이 묶여 있는 수술대로 걸어오며 말했다. 


“아니, 저기요. 그러지 말고 그냥 쉬세요.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왜 이런 일을 하고 다니는거에요?” 나는 너무 황당하고 정말 궁금했다. 정관수술 하러 와서 이게 웬 봉변이란 말인가. 


“우리는 저출산 시대를 맞은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 소속이요. 딥 웹에서 모집하고 활동하기 때문에 굉장히 비밀스럽지. 당신은 어차피 알 수가 없어. 말해봐야 모르는데 내가 설명하는 건 시간낭비지 않나? 그냥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단체라고만 알아 둬.” 50대 남자가 여전히 간이의자에 앉아 말했다.  


그들은 어느새 나에게 반말을 섞어 쓰고 있다. 그런데 나는 묶여 있는 입장에서 괜히 밉보이기 싫은 것인지 여전히 존대말이 나온다. 


“내가 오늘 정관수술 하는 건 어떻게 알았죠?”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해킹하고 도청해서 알았지. 뭘 그렇게 궁금해 해? 우리가 막 학교수업시간처럼 상세하게 알려줄 것 같아?” 40대 남자가 팔짱을 낀 자세로 말했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네가 지금 그 말을 한 걸 후회하게 해주마. 사이버 안전국에 싹 신고할 테니까. 


“정관수술 하려고 하면 이렇게 갑자기 침입해서 수술을 못하게 하고요? 내가 물었다.

“무조건 막지 않아. 그렇게 하면 너무 많거든. 그리고 이미 아이가 있는 사람까지 정관수술을 못하게 하는 건 우리 내부에서도 너무하다고 결론을 내렸어. 그래서 우리는 당신처럼 결혼도 안했고, 아이도 없는 사람이 정관수술을 하겠다고 나설 때만 우리도 작전에 나서는 거야” 40대 남자가 수술실을 느릿느릿 걸어다니며 말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아주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네요. 아주 훌륭하세요. 그럼 두분 목적은 오늘 달성하셨으니까 제 팔다리에 채워진 구속장치 좀 풀어주세요. 전 이제 가봐야겠네요” 나는 조금 빈정거리며 말했다. 두고 봐라. 나가자 마자 경찰서 가서 당신들 신고할 거야. 감옥에서 푹 썩어라 이놈들아. 


“근데 먼저 뭐 하나 물읍시다. 왜 그랬어요? 결혼도 안했는데 정관수술이라니?” 여전히 간이의자에 앉아있는 50대 남자가 물었다. 

“상관 없잖아요” 


“왜 이러시나. 이유를 알아야 우리도 어떻게 할지 정하죠.” 

“뭘 어떻게 해요?” 나는 황당해서 50대 남자에게 물었다.

“아니 그럼 여기서 그냥 보내주면 다음에 또 다른 병원갈텐데, 그냥 보내줄거라 생각했소?” 50대 남자의 표정에 순간 광기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등에 식은땀이 난다. 일단 대답은 해야 안전하게 여기를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섹스할 때 편하려구요” 

“그것 때문에 미혼에 자식도 없는데 정관수술을 한다고? 그 말을 당신이라면 믿겠어?” 


쉽게 보내줄 느낌이 아니다. 


“난 내 유전자를 남기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인간으로서 그건 본능인데? 생각을 하고 말고가 아니고 본능이라고” 50대가 노려보며 말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겠죠. 나는 본능과 이성이 서로 합의점을 찾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당신 이성은 뭐래?” 


“학생 때는 입시전쟁, 졸업하고 나서는 취업전쟁, 취업하고 나서는 생존전쟁, 나는 내가 진짜 내 인생을 살고 있는건지 모르겠어요. 매번 눈앞에 펼쳐진 전장에서 전쟁을 치루다 보니 그냥 지금이 돼 버렸어요. 그런데 육아전쟁으로 또 돌입한다? 저는 그렇게는 하기 싫어요. 이젠 저를 즐겁게 해주는 삶을 살고 싶어요. 나 아니면 내 행복에 관심있는 사람 없으니까. 나라도 나에게 신경쓰려구요”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냥 딱 잘라 말하면 능력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거 아니야? 그냥 당신이 못나서 그런 걸 가지고 행복을 찾네 마네, 여태까지는 진짜 나의 인생을 즐기지 못했네 징징거리는 건 아니냐고” 50대 남자는 나의 말에 계속해서 반박하고 있다.  


“능력이야 제가 엄청 풍족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이 하나 키울 정도는 됩니다. 그리고 책임감 운운하는 건 정말 잘못 짚었어요. 저는 책임감이 강한 편이에요. 그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가 가져야할 책임을 알아요. 그런데 책임감이 강한 것과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피곤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죠. 나는 책임감이 강하지만, 그와 함께 그 책임을 다 하는 것에도 피곤함을 느껴요. 그래서 그 피곤한 일을 나에게 만들어주지 않겠다. 원천 차단하겠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에요” 이번에도 나는 진심을 말했다.


“그냥 나는 이기적이라고 하지 뭔 말이 이렇게 많나. 당신만 인생 즐기면 끝이야? 후손들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너가 왜 빼앗냐고” 50대 남자가 말했다.

“행복한 인생이요? 두 분은 행복한 인생 살고 계세요?” 

“어떻게 매일 행복할 수 있겠어.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행복하지” 


“잘 알고 계시네요. 인생의 대부분은 고통이고, 행복은 아주 가끔 찾아옵니다. 총량으로 따지면 고통이 훨씬 크죠. 가끔의 행복으로 고통이 모두 잊혀지느냐. 그것도 아니죠. 고통은 잊혀지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고통과 함께하는 거지. 자 그러면 묻겠습니다. 행복한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허상 아닙니까?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아요.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개념이라구요. 제가 살아보니까 인생 굳이 경험 안 해봐도 되요. 또 경험해봤다 칩시다. 어차피 죽으면 다 잊어요. 자기가 존재했었다는 것조차 완전히 망각하게 된다고요” 나는 조금 격앙된 말투가 됐다.


“아이고…고집 세네” 50대 남자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아이한테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해야 뭔가 성취를 이룬다. 이런 말도 하기 싫어요. 아이가 제발 태어나게 해달라고 울고불고 빌었던 것도 아닌데, 내 마음대로 낳아 놓고, 열심히 살라고 강요한다…이게 말이 되나요. 동의 안 받고 낳았으면, 그 다음부터는 아이한테 맡겨야죠. 뭘 하든 뭘 하고 싶든. 그런데 부모가 된 입장에서 그 말을 안하고 살 수 없을 것 같단 말이죠.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무언가를 강요하고 요구하겠죠. 그 과정에서 나도 아이도 스트레스 받고. 이런 모순도 싫어요” 나는 말이 많아지고 있다.


정관수술 테러범들의 태도가 누그러진 듯하다. 50대 남자는 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논쟁에서 내가 승기를 잡은 듯 하다. 


“그래도 자식 키우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 가만히 듣고 있던 40대 남자가 물었다. 

“물론 있겠죠” 

“그럼 그 재미로 살면 되잖아” 

“아이를 키우는 희생과 그 과정에서 얻는 재미의 총합을 따져보면, 저라는 사람 개인의 성향으로 봤을 때 안 키우는 것이 더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을 해서요” 내가 말했다.


“경험도 안해보고 그걸 어떻게 알아?” 

“생각해보니까 알겠어요. 내 생각이 맞나 틀렸나를 알아보기 위해 아이를 낳을 수는 없잖아요. 낳아보고 아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라고 하는게 더 안 좋잖아요?” 나는 말이 술술 나온다.


“저녁 때 집에 가면 귀여운 자식들이 있는 모습 좋지 않을까?” 

“인스타랑 페이스북에서 보면 돼요. 굳이 제 자식 아니어도 귀여움을 느낄 수 있죠” 실제로 내 인스타그램을 보면 친구들의 육아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들이 고르고 고른 귀여운 사진과 함께.

“당신 자식이 아니잖아” 

“우리 인류의 자식인데, 내 자식 아니라고 귀여워도 못해요?” 


“최지훈씨 그러다가 대한민국 없어져. 우리가 피땀 흘려 건국한 나라, 이 나라는 인구가 뒷받침 돼야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다고. 정말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서 다시 힘들게 살았으면 좋겠어?” 50대 남자가 국가적 관점을 들고 나왔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행복을 희생하라는 건가요? 구닥다리 같은 이야기군요. 나는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요. 삶은 유한해요. 이번 생은 누구의 아빠의 역할이 아닌 단지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요.” 나는 내 인생관까지 말했다.


“나중에 당신 늙으면 돌봐줄 사람도 없다구” 40대가 안타깝다는 말투로 말했다. 

“선생님은 늙어서 본인 돌보게 하려고 아기 낳았어요?” 내가 물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그런 얘기구만.” 


“약간이야 도움 받을 일 있겠지. 그런데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야” 40대가 말했다.

“나는 내 몸이 스스로 컨트롤 되지 않을 때가 오면 요양원에 갈거에요. 자식 키우는데 드는 돈 모아서 좋은 요양원 가죠 뭐. 요즘에 보면 자식들도 부모가 늙고 병들면 요양원으로 모시던데, 자식이 있어서 보살펴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진짜 올드한 거죠” 내가 말했다. 


“결혼도 안할거야?” 50대 남자의 묻는 표정이 이제 좀 귀찮아 보인다. 

“결혼은 인연이 있다면 하고 싶어요” 

“자식도 안 낳을 건데 왜?” 

“나는 나와 마음이 통하는 동반자와 인생을 함께하고 싶은 로맨틱한 판타지가 있어요. 자식의 유무와 상관없는거에요” 나는 처음보는 아저씨들에게 별 얘기를 다 하고 있다.


“이런 당신을 누가 좋아하겠어” 

“어딘가는 있겠죠. 없으면 할 수 없고요. 어차피 자식도 안 낳을거니까 나는 적어도 환갑 전에 애를 대학보내야겠다 같은 압박도 없어요. 인연이 있으면 하고, 아님 말고요. 자식을 안 낳을거면 결혼하는 시기는 중요하지 않아져요. 누구랑 하느냐가 중요하죠” 내가 말했다.


왜인지 정관수술 테러범들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포기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평온함이 보인다. 



3

“이봐, 최지훈은 영 안되겠지?” 50대 남자가 40대 남자에게 물었다. 

“네, 저도 쭉 듣고 몇 마디 하면서 생각해봤는데, 이 인간은 진짜 그냥 보내주면 안되겠네요” 40대 남자가 말했다. 

“그럼 가져온 거 준비합시다” 50대가 말했다. 


40대 남자가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수술실 벽쪽에 기대어 세워져 있던 가방에서 주사기 2개와 주사약병 2개를 꺼냈다. 40대는 탁자위에 타월을 깔고 주사기에 주사약을 하나씩 채웠다. 곧 타월 위에 약으로 채워진 두개의 주사기가 올려졌다.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왔다. 


“선생님들, 뭐하시려구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는 잘만 말하더니 왜 목소리를 떨어?” 40대 남자가 주사기를 올려놓은 탁자 옆에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 

“최지훈씨 당신은 구제불능이라서 우리가 조치를 취하고 가기로 결정했어요” 50대 남자가 말했다. 

“네?” 나는 너무 놀라 거의 비명처럼 되물었다. 


“이제 곧 우리가 당신에게 취할 조치를 알려줄게요. 깨어나서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는 알아야 되니까. 저기 주사기 두개 중에 하나는 마취제야. 아까 당신이 의사들에게 맞았던 수면 마취제와 같은 거. 저걸 맞으면 또 곧 잠들거고” 

“안돼!!! 하지마!!” 


“잘 들어. 그 다음 주사가 더 중요하니까. 당신이 마취로 잠들면 당신의 고환에 우리 단체에서 개발한 슈퍼정자생산약물을 주사할 거야. 이 주사는 당신의 정자를 강력하게 만들거야. 정자의 수도 정상인의 3배까지 증가하지. 또 콘돔도 앞으로는 당신의 피임을 보장하지 못해. 정자의 힘이 좋아져서 콘돔을 착용한 채 사정했을 때는 물론이고, 쿠퍼액만 나와도 당신의 정자들은 콘돔을 뚫고나와 난자를 향해 헤엄쳐 갈거야.” 말하고 있는 50대 남자의 표정은 담담해 보인다. 

“하기만 해봐! 내가 당신들 다 신고해서 감방에서 죽게 할 테니까!!” 


“여자가 피임약을 먹어도 소용없을 거야. 당신이 생산한 슈퍼정자는 여성의 몸에서 세 달을 살아있고, 호르몬을 조절하는 피임약의 성분을 무효화 시키지. 그러다가 배란이 되면 임신이 되는거고. 살정제로도 슈퍼정자는 안 죽으니까 기억해둬”

“지금 풀어주면 신고 안할게! 없던일로 할게!” 


“아차차. 이 말을 안했네. 앞으로는 굳이 정관수술 하러오지 마. 이 주사 맞으면 아무리 정관을 자르고 지지고 해도 며칠이면 다시 연결돼. 정관이 자동 재생능력을 갖게 되는거지. 돈,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알려주는거야” 50대 남자는 지훈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고 계속 자기 할 말을 한다.

“선생님들!! 제발! 제발 봐주세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앞으로 최지훈씨가 하는 섹스는 거의 100%에 가까운 임신 가능성을 갖게 된다는 거야. 잘 기억해 두고. 이따 깨어나면 고환이 좀 뻐근할거야. 주사 때문에 그런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하루이틀 지나면 괜찮아져.” 

“야!! 야 이 새끼들아!!!” 나는 목이 쉬도록 소리질렀다.

“이봐, 이제 주사하지” 


40대 남자가 주사기 하나를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팔다리를 움직였지만 수술대만 덜컹거릴뿐 팔을 뺄 수 없었다. 40대 남자가 내 팔에 주사를 꼽았다. 그가 말했다. “마취 들어갑니다” 



4

“괜찮으세요? 일어나세요” 간호사가 내 어깨를 흔들며 깨운다.  


이게 현실인가. 아까는 환각이었나. 꿈이었나. 고환과 성기가 뻐근하게 아프다. 수술은 한건가? 


“수술 잘 됐어요?” 내가 물었다.

“아니요…저희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모르겠어요. 쓰러져 있다가 좀 전에 깼어요. 환자분 기억나는거 있어요?” 간호사가 말했다. 


꼼꼼하게 뜯어보니 간호사도 서있기조차 힘든지 수술대에 손을 올리고 몸을 지지하고 있다. 나머지 의사 한명과 간호사 한명은 아직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았는지, 구겨버린 종이 같은 모양으로 바닥에 앉아있다. 


입에서 욕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탈의실로 가서 휴대폰을 찾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현장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그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건물에 설치된 모든 CCTV의 영상이 날아가 있었다. 남은 건 내 고환의 주사자국과 뻐근한 통증뿐. 



5

“오빠, 오늘도 나 지켜줄거야?” 데이트 후에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줬다. 집 앞에서 그녀가 약간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 내가 너랑 잘라고 만나는게 아니란거 잘 알잖아” 아니다. 거짓말이다. 이런식으로 널 지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너와의 잠자리를 수백번 상상했다. 너와 섹스를 하고 싶다. 밤새 하고 싶다. 


“아직 그렇게 안 늦었는데, 들어가서 같이 넷플릭스 볼래?” 그녀가 물었다. 

“아니야, 아니야.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긴 좀 그렇지. 너도 불편할 것 같고” 거짓말이다. 생각난 말이 이런 조선시대 같은 말이라니 나도 내가 한심하다. 예전에는 여자친구 집에 많이 갔다. 나는 너의 방에서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 억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이를 갖게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원천봉쇄하는 것이 낫다. 


“흠. 처음엔 오빠가 나를 존중해 주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요즘엔 내가 여자로 매력이 없어서 그런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좀 안 좋을 때가 있어” 하기 힘든 말이었는지 그녀는 시선을 바닥에 두고 천천히 뭔가를 끌어올리듯이 말했다.


“그런거 아니야. 너가 얼마나 매력있는 사람인데.” 나는 부인했다.

“그런데 둘만 같이 있고 싶지는 않고?” 

“그런게 아니라…” 

“알았어. 그럼 잘가” 


그녀가 홱 돌아서서 빌라 입구로 들어갔다. 그녀가 2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는 동안 센서 등의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발길을 돌렸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쏴아아 소리를 냈다. 나를 비웃는 소리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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