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망해가고 있는 사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반도체의 나라에서 문학의 나라라니 이 얼마나 강렬한 반전인가.
한림원은 한강을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써낸 작가로 평가했다고 썼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듯이 개개인의 역사에도 트라우마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강하게 극복하는 것만이 능사인 줄만 알았는데 연약함을 드러냈다는 것은 문학의 힘일까? 그러면서도 시적 산문의 강렬함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이 연약함을 담금질해 만들 수 있는 강철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문학이 아니라면 빚을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작품을 아직 읽은 적이 없다. 맨부커상을 수상했다고 유행이 불었을 때 책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 것이 전부다. 그러므로 실제로 작가의 작품이 강렬한지 연약한지 어떤지는 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럴 때 그 작품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혹은 이미 읽고 혹평한 후라 후회했을 수도 있겠지만,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아무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글쓰기에 잠들었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듯한 신선한 사건이었다. 삼성전자가 죽을 쑤고 다 죽어가도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반도체의 나라도 좋지만 노벨문학상의 나라라니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이번에도 노벨상을 수상했다고 유행에 편승해서 책을 읽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문학과 작가의 쾌거일지니 그래도 한강 작가의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노벨상 감인지. 그렇지 않다고 쉽게 못하겠지만. 분명 여느때 처럼 서평을 쓸때 이번만큼은 내 맘$점(평점)을 줄 때 최초로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강 작가 떠도는 사진만 보고는 한참 어린 줄(젊은 줄) 알았는데 자실만큼 자셨네. 그러므로 글쓰기가 너무 늦었다고 좌절할 일은 아니다. 다만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의 부담감은 내려놓고 앞으로 편히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나 할까? 노벨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동치미국물부터 마시고 있으니 실제 떡도 먹고 싶고 동치미국물도 마시고 싶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떡으로 축하, 동치미국물로 건배!
ps : 노벨상 수상자를 그리는 화가가 따로 있는데 비밀리에 작업을 하며, 저 그림의 노르스름한 색은 사실 금색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