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룬 Nov 01. 2024

탄산온천에 다녀왔습니다.

나란히 동동 떠오른 얼굴이 되어



   봄의 신록이 여름의 푸르름에 손을 내어주던 즈음, 남쪽은 곧 장마가 올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망설이든 가족여행을 오히려 서둘러 가기로 결정했다. 몇 해전 제주도 여행에선 한적한 길을, 미술관 앞 주차장을, 가파른 오름을 내달리던 아이가 청소년이 되었고 우리 가족의 여행 분위기도 아마 새로워질 참이었다. 이번 방문에서는 하고 싶은 일 혹은 가고 싶은 장소를 각자 하나씩 정하고 함께 하기로 했는데, 아이의 선택은 뜻밖에 산방산의 탄산온천이었다. 뽀글뽀글 달콤하게 터지는 환타 온천이라도 기대했던 걸까. 사실은 목욕탕일 게 뻔한 온천이겠지, 조금은 느긋한 분위기의 여행 계획이 세워졌다.

그리고 우리는 비 내리는 제주도의 아침을 맞았다.  


 “비 오는 날은 탄산온천이지.”


느지막이 일어나 운무에 둘러싸인 산방산을 바라보며 야외 관광이 어려운 날씨에 어울리는 행선지를 정했다. 어차피 내내 물에 빠질 것이라며 아이는 세수도 생략하고 온천으로 향했다.


   평소의 나에게 목욕탕, 온천, 찜질방은 벽이 높은 장소였다.

빨대를 쪼르륵 꽂은 요구르트 한 줄이나 딸기 우유에 넘어가기도 했으나, 아주아주 어릴 때의 일이었다. 사춘기를 겪으며 옷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입장 조건은 출입금지와 같은 말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옷을 벗고 모여있다니,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목욕탕 문을 열었을 때 숨이 턱 막히는 더운 공기, 바가지와 대야로 자리를 맡아두어야 하는 무언의 쟁탈전, 무엇보다 모르는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말 걸기는 위협이었다. 이후로 가지 않은지 수십 년이 지났다.  

   사실 아이와 그이가 남탕으로 가고 나면 몰래 빠져나와 따로 시간을 보낼까도 생각했다. 나만 여자니까 그들이 나올 때에 맞춰 개운한 척하며 씻고 나니 배고프다 어서 밥 먹자,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여행자의 마음은 여유와 용기가 넘치는 법. 내 손엔 옷장 숫자가 굵게 적힌 빨간색 팔찌 열쇠가 들려있었다.


   어차피 들어섰고, 또 어차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남의 동네이니 온천 마니아처럼 굴어볼까 어깨를 펴보았다. 그랬는데, 안경을 차에 두고 내린 바람에 입구에서부터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하니,  눈앞 공기에 충격 흡수 쿠션이 생긴 것 같았다. 탈의실의 습한 공기도, 여러 대의 드라이기 소리도 조금은 반가웠다. 후다닥 입장 준비를 마치고 입구의 문을 힘차게 밀었다. 울리는 말소리, 흐르는 물소리 다름 아닌 목욕탕이었다.  

   혼자 씻고 지낸 세월이 쌓여, 그사이 어쩌면 나란히 씻는 일이 가능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손으로 수건을 반쯤 가려 들고, 다른 손으로 바가지를 쥐고는 비어있는 샤워기 앞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길. 그제야 가만히 앉아 공간을 둘러보았다.

   전면에 커다란 탕이 두 개가 붙어있었다. 그곳이 바로 탄산온천. 그 앞으로 다섯 명쯤 들어갈만한 온탕 냉탕 열탕이 있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씻을 수 있는 자리와 샤워기가 바깥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커다란 벽시계와 외부로 나가는 계단이 한눈에 들어왔고, 세신사의 관리를 받을 수 있는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온천탕 위의 벽에는 바로 이 온천의 대단한 효과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적힌 큰 안내문이 붙어있었는데, 다만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안 되었다. 시력 때문에 글자를 놓쳤는지, 사람이 많아 긴장을 한 건지.  

   사람이 정말 많긴 많았다. 탄산 온천에는 수건을 머리 위로 돌려감은 얼굴들이 동동 떠있었다. 탕 밖에는 붉게 익은 몸들이 바쁘게 오갔다. 어색한 표정일까 봐,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눈치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탄산이 몸에 흡수되면, 그다음은 만병통치일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으니까. 하다못해 여행기간 중 방해가 되는 비염이라도 떨구고 가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샤워를 막 마친 어르신 한 분이 성큼성큼 걸어 온천의 온탕에서 얼마간, 원수탕에서 얼마간 몸을 담그는 것을 지켜보았다. 머리로 말고 몸으로 사용 방법을 배우니 커다란 안내문의 설명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온탕에서 얼마간, 원수탕에서 얼마나 몸을 데우며 들락거렸다. 탄산이 몸에 붙는 게 눈으로 보였다. 신기하기도, 재밌기도 했다. 나도 수건을 뒤집어쓴 동동 떠오른 얼굴 중 하나가 되었다. 물은 따뜻했고, 몸은 나른해졌다. 탕 넘나들기를 두세 번 반복하고 나니 잠이 솔솔 밀려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살집이 많은 몸, 뼈가 보이는 몸, 근육이 있는 몸, 매끈한 몸, 상처가 있는 몸, 부황 자국이 등판을 가득 채운 몸, 심지어 부항을 달고 걸어 다니는 몸, 십자가 목걸이를 걸친 몸, 옥빛 팔찌를 걸친 몸, 구부정한 몸, 꼿꼿한 몸, 나른한 몸, 물을 끼얹는 몸, 도망가는 몸, 잡으러 다니는 몸, 가만 앉아있기도 힘든 몸, 지치지 않고 탕을 넘나드는 몸,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몸, 차가워 보이는 몸, 목욕탕의 기운을 다 빨아들인 몸, 지인을 만나 반가운 몸, 이쁘고 이쁜 딸내미의 몸, 그 딸보다 작은 엄마의 몸, 구석으로 향하는 몸, 물보라를 일으키며 탕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몸을 보았다. 나는 모서리를 따라 천천히 걷는 몸 정도였을 것이다.

   미끄러운 탕 밖에서 발끝이 노랗게 변하도록 힘주고 걷던 아이를 보고 웃었는데, 잘 넘어지지 않는 어른이지만 고개를 숙여보니 나의 발끝도 그랬다. 온탕과 원수탕 입수를 반복하는 시간과 순서가 일정하던 어르신들처럼 커다란 벽시계의 바늘을 주시했다. 소곤거릴수록 크게 울리는 탕 안에서 어느 모녀가 나누는 이야기가 좀 슬펐지만, 물에 젖은 얼굴이니 눈물인지 땀인지 그대로 흐르게 두었을 뿐이었다. 누군가 탕으로 들어올 때면 다 같이 무릎을 세우거나 방향을 돌려 앉곤 했다.  

   흐린 시야, 희뿌연 수증기가 가득한 곳에서 다른 몸들은 닮은 듯 보였고 나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 무엇이 싫었던지 따지지 않아도 될 만큼 제법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어디서 왔나.”

   결국 한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고 내게 했음이 분명한 질문이었다. 바로 옆자리도 아니고 하나 건너 자리에서 들려온 목소리.

손가락 끝이 쭈굴쭈굴해질 만큼 온천 탐험이 제법 길어져 입이 근질거릴 때가 되기도 했다. 헤죽 웃으며 대답을 드렸다. 탕 안의 시선이 1초 정도 내게로 모였다가 이내 흩어졌다. 어린 시절 막힘없이 말을 걸어오던 누군가처럼 말을 이어갔다. 이번엔 내가.

 

 “어르신은 어디서 오셨어요, 혼자 세요?”

산방산 아래쪽에 사는, 같이 온 친구들은 저기 저 냉탕에 있는, 오늘은 좀 늦게 들어와 따로 여기 앉아있게 된, 그 어르신은 내게 갈치조림 말고 보말 칼국수를 먹고 가라 이르셨다. 비가 오니까. 그러겠다 대답하며, 정말 점심은 칼국수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동안 꼼짝 않던 사정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다르지만 닮아있는 사람들처럼, 동동 떠오른 얼굴 중 하나였다.  목욕탕에 처음 간 사람처럼 한껏 즐거웠고, 다음엔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녹아들 자신도 있다. 비가 와도 좋은 곳, 탄산온천에 다녀왔다.  



이전 01화 집순이의 외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