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말인데도 무더운 날씨였다.
토요일이지만 늦잠을 잘 수 없었다. 6시 30분에 일어나 백미찰진밥 취사 버튼을 눌렀다. 어젯밤 옷걸이에 걸어둔 옷 두벌을 살폈다. 흰색 반팔티는 소파에 개워 두고, 바지와 상의가 잘 다려졌는지 확인했다. 장조림과 계란찜을 식탁 가운데에 놓고 된장국을 데웠다. 사과와 무화과도 접시에 담았다.
야구 응원가에 파이팅을 외치며 아이들을 깨웠다. 결전의 날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엄마를 보고 아이들은 더 긴장하는 듯 했다. 아이들은 나에게 혹시 이따 창피하게 그러면 안 된다고 당부한다. 설거지는 뒤로 하고, 8시까지 집결하라는 공지대로 집을 나섰다. 아이들을 도장에 데려다 주고 나는 따로 출발했다.
오늘은 태권도 국기원 심사날.
나는 오늘 세 명의 학부모다. 1품 심사를 보는 초등학생 두 명, 2단 심사를 보는 성인 한 명.
우리 집 초등학생들은 날라리로 태권도를 다니다 말다 한지라 2년만에 1품 심사를 보게 되었다. 검은띠를 받은지 1년만에 엄마는 오늘 2단에 도전한다. 카메라로 세 명의 모습을 담아놔야 하니 평소에 안 챙기던 무선배터리 충전기까지 챙겼다.
심사장에 도착하니 노란 태권도장 버스가 수없이 늘어서 있고, 사범님을 따라 줄지어 들어가는 꼬마들이 보였다. 스포츠센터 건물에 도착하니 곳곳에서 크고 작은 학생들이 품새를 연습 중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기압 소리가 들린다. 1층 심사 대기석과 2층 관람석에 아이들이 가득했다.
어떤 나라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까. 유치원생부터 성인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태극기가 새겨진 옷을 입고 무도심사를 받는 모습. 나는 새삼 신발을 벗고 선 아이들의 맨발이 장하게 느껴졌다.
한가운데 커다란 파란 매트가 세 군데 깔려 있다. 아이들은 매트 위 노란색 작은 네모칸에 각자 자리를 찾아 서게 된다. 정면에 심사위원이 의자에 앉아 점수를 매긴다.
세 가지 종목에서 각각 세 동작 이상 틀리면 탈락이다.
20여 년전, 나의 경험으로는 첫 번째 품새 파트가 가장 떨렸다. 여럿이 함께 동작을 하니 보는 사람은 쉬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내 몸동작 속도와 같을 리 없다. 시작은 동시에 하지만 몇 초가 지나면 각자 다른 호흡으로 동작을 이어간다. 가장 속도가 빠른 사람의 동작이 보이면 마음이 급해진다. 나만의 리듬으로 차분히 품새를 하자고 다짐하고 선 자리지만 결코 쉽지 않다. 연습했던 동작이 갑자기 머리 속에서 하얘질 수도 있고, 옆에 있는 아이가 틀리면 내가 맞는지 헷갈릴 수도 있다.
당일에 1장부터 8장까지의 품새 중 뽑기로 두 개가 선택된다.
오늘은 역대급으로 쉬운 품새가 뽑혔다. 1장과 3장. 어제까지 열심히 8장을 연습하던 아들이 걱정됐다.
184번. 심사 일주일 전까지 순서도 헷갈려 사범님의 마음 고생을 시켰던 아들이 등장했다. 비장한 표정으로 앞줄에 선 아이는 절도 있고 자신 있게 품새를 마무리했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는 격파 쪽으로 이동했다. 나보다 긴장한 건 사범님이었으리라.
188번. 이번에는 딸이다. 어제까지 동생에게 훈계하던 딸은 긴장한 듯 했다. 기본 동작에서 살짝 실수가 있었지만 무난하게 해냈다. 격파가 끝나면 머리와 가슴 보호장비를 차러 가면 된다. 발차기와 겨루기가 마지막 관문이다. 실수가 마음에 걸렸던지 아이는 격파와 겨루기에 더욱 집중하는 것 같았다. 빨간색 보호대를 머리와 가슴에 차더니 겨루기 준비 자세를 잡는다.
상대는 약간 키가 더 큰 남자 아이. 진행요원이 손을 위로 들어 아래로 내리며 시작 사인을 알렸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상대 아이가 뒤로 넘어졌다. 딸이 두 팔을 아래로 막더니 순간 상대 가슴쪽으로 발차기를 했던 것이다. 나는 어젯밤 아이들이 나에게 알려줬던 기술이 떠올랐다. 사범님이 알려주신 필살기라고 했다. 아들은 같은 도장에 다니는 누나를 상대로 만나 그 기술에 당하고는 머쓱해했다.
밖으로 나오니 왼쪽 팔에 4번을 붙인 엄마가 맨발로 연습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란색으로 엄마 이름이 야무지게 새겨진 검은 띠를 매고서 말이다. 내가 보기에 엄마의 품새는 작년보다 훨씬 유연하고 힘이 빠진 느낌이었다. 이전에는 힘으로 골프 스윙을 하는 남자 같았다면 이제는 좀 더 부드럽게 스윙하는 아가씨 같다고나 할까. 고려 품새를 연습하는 엄마의 모습이 꽤나 진지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했다.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엄마의 모습이 겹쳐 빛났다.
지나가는 한 아이가 엄마가 도복을 입고, 발차기하는 모습을 보며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게 실화인지 잘못 본 것인지 확인하는 표정이었다.
2품 심사가 끝날 때즈음 진행요원은 2단 심사자들을 불렀다. 엄마가 하얀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초등학교 운동회날, 다섯명씩 줄을 서서 달리기 시합을 기다리던 긴장감이 나에게 전해졌다. 엄마도 지금 그런 느낌이 아닐까. 품새가 머리 속에서 까매진 건 아닐까. 아이들 심사 때보다 나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2단 심사가 시작되었다.
오늘 2단은 6장과 고려가 품새 심사로 선택되었다. 5명의 심사자가 각자 자리에 섰다. 20대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엄마도 매트 위에 섰다. 엄마는 작년과 다르게 옆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천천히 자기 속도로 동작을 해나갔다. 살짝 느린 속도지만 뒤처지지 않는 무도인처럼, 날카롭지 않은 펜촉이지만 뭉툭함 자체로 자신의 고유함을 발휘하는 발차기로.
품새를 마치고 다들 준비된 격파 송판 앞에 섰다. 진행 요원이 엄마에게 다가가더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큰 기압과 함께 송판을 깼다. 마지막 발차기와 겨루기가 남았다. 뒷차기에서 멈칫하며 동작을 틀린 듯 했다. 겨루기 상대는 키가 크고 날씬한 아가씨였는데 쉴새 없이 발차기를 해댔다. 엄마도 처음에는 상대를 살피다 질세라 발차기를 날렸다. 엄마까지 3명이 모두 잘해냈다.
심사가 시작되기 전, 엄마가 연습하고 있을 때 심사위원 한 분이 다가와 몇 단을 보는지 물었다고 했다. 격파 전 진행요원은 엄마에게 다가와 하실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한다.
“네, 당연하죠.”
엄마는 시니어 우대는 안 하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 명의 학부모였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말도 마다하고 하루에 두세시간을 수련하느라 애쓴 세 명에게 나는 밥을 챙겨준 것밖에 한 일이 없지만 마치 올림픽에 자식들을 내보낸 부모가 된 듯 뿌듯했다. 오늘 심사를 본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도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잘해냈다고. 오늘 무대에서처럼 자신 있게, 자신만의 리듬으로 무엇이든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1품만 따면 태권도를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아이들이 심사가 끝나고 오더니 말했다. 어서 내년이 되면 2품을 따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