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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메루 Dec 05. 2022

배운다, 존재한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낄 때

 

學而時習之면 不亦說呼아,
有朋이 自遠訪來면 不亦樂呼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문장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     


딸 부잣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려서 피아노를 배웠다. 엄마는 없는 살림에 피아노까지 장만해주셨다. 그런데 악기에 소질이 없는지 피아노 치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끈기가 부족한 탓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매달 레슨비를 독촉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그 후로 무언가 배우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학원비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꾹꾹 눌러놓았던 배움에 대한 욕구는 내속에 잠자고 있다 한순간 폭발하듯 발현되었다. 돈 걱정 없이 오로지 열정만 있으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도화선이었다.

친정엄마를 돌봐야 하는데 요양보호자 자격증을 따면 용돈을 벌 수 있다는 지인 말을 듣고 학원을 알아보았다. 적지 않은 학원비가 발목을 잡아서 망설이고 있던 차에 큰언니가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서울시민이면 무료로 교육을 시켜주는 곳이 있대, 군포에 있다고 하던데... 우리 시누이도 거기서 요양보호사 자격증 땄대. 알아봐 봐”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기술 교육원이 네 군데 있는데 그중 남부점이 군포에 있었다. 안양에 사는 내가 다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교육일정을 확인해 보고 바로 시댁으로 주소를 옮겼다. 보통 서울 거주 기간이 좀 되어야 합격하는데 그해는 운이 좋았다. 넉 달 동안 이론과 실습을 마치고 자격시험을 치른 후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내 손에 들어왔다. 거기서 몇십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기도 했다.


어느 날 옆 강의실 조경 수업이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 정원을 가꾸며 한창 식물 키우기에 재미를 느꼈다. 관심이 있으면 보이게 되나 보다. 이 또한 국가지원 과정이었다. 실업자 대상인데 ‘내일 배움 카드’를 발급받으면 매달 용돈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기회였다. 소정의 심사를 받고 자격을 갖추었다. 다섯 달 동안 조경 공부를 열심히 해서 조경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야외 실습을 할 때 커피 향이 진동해서 끌리듯 가보니 바리스타 교육 중이었다. 커피에 관심이 많던 터라 이 과정에도 지원했다. 커리큘럼이 잘 되어 있는 인기 수업이라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대기자로 분류되었다가 결원이 생겨서 합류했다. 카페 창업을 고려하거나 커피전문점에 취업을 하려는 분들이 많았다.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배우며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자기 배우는 거 좋아하니 이번엔 3D 프린터 배워봐, 앞으로 꽤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일 년 넘게 부지런히 배우러 다니던 내가 집에 있는 게 심심해 보였는지 옆지기가 한마디 했다.

내가 또 누구인가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3D 프린터 과정은 동부점에 있었다. 집에서 한 시간 반은 족히 걸렸다. 거리는 내 배움에 대한 열정을 식히지 못했다. ‘3D 프린터’라는 물건이 신기해서 직접 다루어 보고 싶었다. 장거리 통학이 좀 힘들었지만 나름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으며 유용하게 시간을 보냈다. 디자인 실기 2급 자격증도 땄다. 젊은 친구들을 따라가기 벅찼지만 도움을 받으며 과정을 수료했다. 코끼리 핸드폰 거치대, 책갈피, 강아지 이름표, 이어폰 선 정리대 등을 만들어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정규 학교 교육과정에서는 만날 수 없는 여러 인물을 접했다. 사람 공부도 많이 한 듯하다. 교육 강사에게 주로 배우지만 동기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다. 간혹 재야의 고수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난 무언가를 배울 때 ‘사는 맛’을 느낀다. 나를 살아가게 이끄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좋은 분들과 서로 도와가면 어떤 목표를 이루어내는 것, 이게 참 매력적이다.


옆지기는 독학을 잘한다. 무언가에 꽂히면 혼자 공부해서 불과 몇 주 만에 능력자가 되어있다. 반면에 난 독학보다는 여럿이 함께 공부해야 한다. 서로 동기부여를 해주어야 한다. 일정 시간 매여서 숙달하는 훈련과정이 꼭 필요하다. 성실하게 강의실에 출석해야 뭔가 보람찬 기분이 든다.


이번엔 친환경가구제작을 배우게 되었다. 조경을 공부하며 나무를 직접 만져보았을 때 그 느낌이 좋았다. 목공에도 관심은 생겨서 기회가 되면 배워볼까 생각했다. 코로나 때문에 처음으로 정원 미달이 생겨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야간반이라 옆지기의 양해를 구해야 했다. 예전에 한번 말했다가 혼자 밥 먹기 싫다는 대답을 들었다. 목공은 나보다 그의 최근 관심사였다.


“목공을 배우고 싶어서 문의해보니 몇 백만 원이나 든대. 자기가 열심히 배워서 나중에 나 가르쳐주면 되겠네. 잘 배워둬”


지원서를 정성 들여 작성했다. 바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교육과정이 일주일 전에 시작되어 그날부터 바로 수업에 참여했다. 솔직히 나무가 좋긴 하지만 공구 다루기가 두려웠다. 짜임을 꼭 맞추어야 하는데 나 같은 덜렁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일단 배워보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차근차근 열심히 따라가다 보면 잘할 수 있게 될 거야!’

기회는 항상 오지 않는다. 망설이면 다시는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패와 톱질 연습을 좀 했더니 어설프지만 점점 나아졌다. 희망이 보였다. 넉 달 동안은 목공에 푹 빠져 있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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