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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걷다

눈을 감으니 보이는 것

by 조은영 GoodSpirit

새벽인지 저녁인지 모를 어슴푸레한 빛이 잔류하고 있는 때가 나는 참 좋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집 근처 정읍사공원을 걸었다. 공원에서 전북과학대로 연결된 뒷길로 가보니 축구장이 새로 정비되어 있다. 푸른 인조잔디가 푹신하다. 지대가 높아 대학건물 외엔 막힌 데가 없어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느끼는 순간, 왼쪽 눈이 따끔따끔하다. 일이 많은 날이면 시신경을 많이 사용해서인지 왼쪽 눈이 따끔거리는 증상이 간혹 있다. 남편의 왼손가락 사이사이에 내 오른손가락을 슬그머니 포개며 말했다. "나 눈 감고 걸을래. 나의 안전을 부탁해." 나는 눈을 감고 걷는다.


눈을 감고 걷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걸어야 하는 막연함과 두려움.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아도 믿을만한 존재가 있으므로 안전하다는 확신.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사라지면서 그 무엇에도 메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어린 시절은 전자였고 현재는 후자다. 유년에는 모든 게 막연했고 두려웠다. 눈을 감고서 혼자 걷고 있는 마음이었다. 물론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내 삶 전반에 대한 안전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선택과도 관련이 있다. 나는 아빠를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다. 날 때부터 나의 아빠였고 그로 인해 나의 고향, 집, 학교 같은 환경은 고정값이 되었다. 아빠라는 지배적 존재가 만들어낸 환경으로 나는 눈을 떠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은 상황을 자주 맞닥뜨렸다.


그러나 고정값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나는 자잘한 선택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 용돈을 들고서 구멍가게로 가 먹고 싶은 과자를 고르는 단순한 선택은 친구와의 만남에서 먹고 싶은 메뉴가 뭐냐는 질문에 '아무거나 괜찮아.'가 아닌 쫄면이나 돈가스 같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할 힘을 주었고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내가 입을 옷은 내가 직접 가서 사 입는 취향도 만들어주었다. 인간은 끝없는 자잘한 선택들을 적극 행사함으로써 진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결단력의 빛을 발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남편을 택했고 18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어느 때보다 현재의 남편을 사랑한다. 또한 현재의 나의 삶을 가장 사랑한다.


결국 삶에는 변치 않는 상수가 있고, 내가 내리는 수많은 자잘한 선택들이 그 상수를 상쇄할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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