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어진 Jun 02. 2024

계획과 시행착오

그럼에도 이건 꼭! 2

 중학생 무렵이다.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공부를 잘해야만 했다. 성균관대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3화 참고)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노트테이킹 하는 것뿐이었다.(5화 참고) 공부다운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다. 중간고사를 위해 뭐라도 해야 했지만 막막할 뿐이었다.


 엄마를 찾았다.

"엄마, 나 뭐부터 해야 돼?"

엄마는 나를 한 번 쓱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일단 계획부터 세워야지."

"무슨 계획? 어디다가? 어떻게?"

"그건 네가 알아서 해. 5000원 줄 테니까 문방구 가서 계획표 쓸 다이어리 하나 사와."


 내 엄마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알듯 말 듯. 알려주다가 마는 것 같은, 개운하지 않은 느낌.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은 명명백백한 그리고 최선의 가르침이었다.


 5000원을 받아 들고 다짜고짜 동네 문방구로 갔다. 비닐에 싸인 스터디 플래너들을 들춰보았다.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것부터 뜻을 알지 못하는 영어가 심플하게 적힌 것까지. 알록달록 시선을 끄는 스터디 플래너들 중 청록색 다이어리를 골랐다. 손바닥만 한 사이즈가 마음에 쏙 들었다. 얼른 뜯어서 무엇이든 적고 싶었다. 문방구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일단 사긴 샀는데 뭘 적어야 하지?


당시에 샀던 다이어리


 엄마는 분명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아 언니를 찾았다. 당시 내 언니는 시니컬이라는 말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쉽게 말해 사춘기였다.

 

"언니, 엄마가 공부하라고 다이어리 사줬는데 여기에 뭐 적어야 해?"

언니는 대답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중간고사 때 몇 과목 봐?"

"여덟 과목이던가.. 기억 안 나는데."

언니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가득 내쉬며 말했다.

"휴. 하루에 한 과목씩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달력에 날마다 무슨 과목을 공부할지 적어."

"적어 놓고 못하면 어떻게 해?"

언니는 가방을 싸며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적어. 나중에 바꿔도 되니까."

"아. 알겠어!"


 일단 대답부터 하고 나도 언니를 따라 가방을 쌌다. 언니는 틀림없이 중앙도서관으로 갈 것이었다. 나도 오늘부터 언니를 따라가야지. 오늘부터 시작해 봐야지.


 처음으로 중앙도서관에 갔다. 3층에 위치한 열람실에 처음 들어가 보았고, 시야가 가려진 책상들 사이에 처음 앉아보았다. 눈이 부시게 새하얀 조명 아래에서 청록색 다이어리와 검은색 시그노 펜을 꺼냈다. 언니가 말한 대로 그날그날 무슨 과목을 할지 적었다. 국사 3일, 국어 3일, 수학 3일, 과학 3일...... 한 달을 빼곡히 채웠다. 그리고 그날은 국사를 공부했다. 계획을 그렇게 했으니까.


 다음날도 언니를 따라 중앙도서관에 갔다. 계획한 대로 국사책을 펼쳤다. 좋아, 잘하고 있어. 공부는 그런대로 잘 되었다. 한 달 동안 이렇게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뭘 좀 해봤어야 알지. 언니와 엄마는 계획을 세우라고만 알려주고 그것들이 적절한지 검사를 해주지는 않았다. 그러니 처음 세운 그 계획표가 얼마나 엉성했을까. 내 계획에 따르면 국사는 한 달 동안 3일 공부하는 것이 끝이었다. 국사 시험 당일까지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걸 몰라?' 싶지만 그때는 정말로 몰랐다. 국사는 일주일만 지나도 다 까먹어버린다는 것을. 국사 시험 하루 전날에는 반드시 국사만을 위한 시간을 비워두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 열심히 했는데 시험 날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엉성한 계획은 엉성한 시험 결과로 이어졌다.


 몇 주가 흘러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과목도 훨씬 늘어났고, 시험 시간도 늘었다.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했다. 나는 검은색 시그노 펜 대신 연필을 집어 들었다. 무슨 공부를 할지 펜으로 적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바꿀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필로 사각사각 계획을 적었다. 이번에는 4일 싸이클로 과목이 돌아가도록 계획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까먹어버릴 것이 뻔하므로 한 과목을 최대한 자주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 시험 하루 전날에는 다음 날 보는 시험 과목으로만 채워 넣었다. 중간고사 실패 요인들을 적극 반영해서 계획을 세우는 치밀함.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4일 사이클 공부는 꼼꼼한 내 성격과 맞지 않았다. 한 과목을 4일 후에 다시 공부하려면, 꼼꼼하게 공부하면 안 되었다. 꼼꼼할수록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성격 상 꼼꼼하게 공부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했고, 당연히 4일 사이클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꼼꼼함과 사이클 사이의 균형을 찾지 못한 나는 처참한 성적과 함께 그것이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시험은 돌아오는 거야~

 그러나 다행인 것은 다음 시험은 또다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다시 중간고사다.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서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번에는 한 달치의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하루에 무슨 공부를 할지 계획하는 것에 집중했다. 한 달치의 계획은 러프하게 잡고, 꼼꼼한 탓에 다 끝내지 못한 공부가 있다면 다음 날로 미룰 수 있게 여유를 두었다. 그러려면 한 달치 계획을 한눈에 개관할 수 있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이어리를 포기했다. 손바닥만 한 다이어리에 붙어있는 달력은 칸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뭘 적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대신 내 입맛에 맞게 직접 달력을 만들었다. A4용지 한 장에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칸을 나누고 날짜와 요일을 적었다. 형편없이 대충 뚝딱뚝딱. 그 달력에 한 달 동안 무슨 공부를 할지 기록했다. 한 달이 한눈에 들어오니 그전에 쓰던 다이어리보다 훨씬 계획을 세우기 수월했다.



 나는 이 형편없는, 대충 뚝딱 뚝딱이 나와 잘 맞는다고 느꼈다. 이 종이 때문에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을 졸업할 때까지 이 방식을 고수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이 형편없는 달력 한 장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 행위는 나에게 달리기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와도 같았다. 총성이 울리면 달력에 하루를 계획하고, 다음 날 계획을 수정하고, 일주일 후에 해야 할 것을 예측했다. 오롯이 내 필요에 의해서, 나만의 방식대로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칸의 크기를 조절하는 센스도 보여주었다.




 나는 여러 번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계획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계획했고 다시 실패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점차 나를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계획이 나랑 맞고 어떤 방식이 나를 지속시킬 수 있는지.

한 마디로 시행착오. 내가 했던 그 과정은 시행착오가 아니었나 싶다. 나만의 속도를, 나만의 방향을 알아가는 시행착오.


 당시에는 그게 시행착오인지 몰랐다. 그냥 이 계획도 실패. 다른 방식. 이건 못하겠다. 또 다른 방식. 이건 불편하다. 새로운 방식. 그렇게 눈앞에 닥친 시험을 쳐내듯 준비했다. 하지만 시험 점수는 시행착오 횟수에 정비례했다. 시험 점수는 자신의 크기를 키워나감으로써 내가 하고 있는 그것들이 시행착오임을, 지금 잘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내 엄마는 계획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으셨다. 세운 계획이 맞는지 틀렸는지 검사해주지도 않으셨다. 그때는 그게 답답했고 서운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가르쳐주실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건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몇 번의 성공과 몇 번의 실패를 겪어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


 자녀가 스스로 공부하길 원한다면 계획을 세우는 습관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은 어떨까? 날마다 잘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시험을 망쳐가면서, 자기만의 속도를, 자기만의 방식을 깨우치도록 기다려주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혹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쁜 다이어리 하나 사주는 정도가 아닐까?


형편 없는, 대충 뚝딱뚝딱이지만 나의 유년시절 공부를 책임져주었다.
이전 05화 노트테이킹Note-Taking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