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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안 Mar 11. 2024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 용서


하이야, 오늘 아침에도 아빠를 용서해줘서 고마워. 아빠가 오해를 해서 너에게 목소리를 좀 높였구나. 미안해. 그리고 아빠의 사과를 받아줘서 고맙고.



'부모는 자신이 아이를 매일 용서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부모는 매일 아이의 용서를 받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어. 김종원 작가님이 쓴 문장이지. 사실 돌아보면 네가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큰 일을 저지른 적은 거의 없던 것 같아. 다만 아빠의 성급함 때문에 너에게 큰소리로 얘기하거나 다그칠 때가 더 많을 거야.



용서는 대부분 아이의 몫이라는 말은 그러고 보면 참 맞는 말이야. 아빠가 이렇게 아침에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채 너에게 말을 했을 때,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오면 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빠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걸잖아. 그래도 다행히 네가 집을 나설 때 아빠의 얼토당토않은 상황극 농담에 웃음을 터트려서 아빠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어.



아빠와 하이도 그렇고, 사람은 이렇게 용서를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란 생각이 들어. 특별히 아빠가 믿는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지.



성경에서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의 이야기가 나와. 여기서 탕감이란 말은 없었던 걸로 해준다는 뜻이야. 어떤 사람이 나라에 어마어마하게 큰 빚을 졌나봐. 사업을 하다가 여러 번 잘못 됐는지 평생 일해도 못 갚을 정도로 빚을 졌대.



그래서 왕이 불러서 이걸 어떻게 갚을 거냐 물어보는데 이 사람도 답이 없는 거지. 그런데 있잖아, 놀랍게도 왕이 이 사람이 진 빚을 모두 없었던 걸로 해주겠다고 얘기했어. 이 사람이 평생을 어떤 일을 해도 못 갚을 정도의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어.



이 사람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자유로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데 글쎄 자기한테 빚을 진 친구를 만나게 됐네! 그 친구는 이 사람한테 한 900만원 정도 빚을 졌던 것 같아.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한테 빚진 친구가 돈을 못 갚으니까 감옥에 보내버렸다는 거야.



이 사람은 사실 900만원보다 훨씬 더 큰 빚을, 900억도  넘는 빚을 나라에 졌는데도 탕감을 받았잖아. 그런데 이 사람은 친구가 자기에게 진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없었던 걸로 해주지 않고 매정하게 감옥에 넣어버린 거지.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성경에서 왜 하셨을까? 그건, 바로 자기가 받은 용서와 은혜를 모르는 이 사람의 모습이 바로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기 때문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자기에게 900만원 빚 진 사람을 당연히 용서하는 게 맞고 우리도 그렇게 할 것 같지? 그런데, 실은 그렇지 않아.



'독서와 글쓰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빠는 네가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서 자녀에게 어떻게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을까 같은 주제들의 책을 찾아보는 편이야. 아빠는 최근에 저 말을 수첩에 필사해 놓았지. 물론 사람들에 따라 많이 읽은 사람이 결국은 많이 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빠의 개인적인 경험상 독서가 글쓰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는 않더라구.



독서보다 글쓰기는 조금 더 사색이 필요하고, 뭐든 내 식대로 일단 쓰면 된다는 뻔뻔함과 집중이 필요하더라. 둘 다 글자를 매개로 하지만 실은 전혀 다른 활동인 것 같아. 머릿속에 떠다니는 여러 아이디어와 표현들을 단지 30cm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종이나 모니터에 옮기는 것뿐인데 그게 참 쉽지 않지. 글쓰기는 독서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하는 거라 비슷해 보이지만 결코 비슷하지 않은 전혀 다른 행위인 거야. 그러니까 아예 '독서와 글쓰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저렇게 얘기하는 거겠지.




네가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고 해서 아빠가 억지로 너에게 글쓰기를 시킬 수는 없잖니. 그래서 아빠는 종종 너에게 오늘 무슨 무슨 일이 재밌었으니, 오래 기억할 수 있게 그걸 일기로 써보는 게 어때? 하고 약간의 소스만 너에게 주려고 한단다.


그럼 다시 용서로 돌아가 볼까? 아빤 이렇게 말하고 싶어. '용서받는 것과 용서하는 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야. 내가 큰 잘못을 용서받았다고 해서 나도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면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으셨겠지. 그게 안 되니까. 용서란 게 내가 아무리 큰 용서를 받아도 내가 직접 또 누군가를 용서하기는 또 다른 차원으로 어려우니까 얘기하신 거지.



아빠를 돌아봐도 그래. 아빠는 한동안 교회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죄인이라는 개념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그게 사실 실감이 안 났거든. 그런데 어느 날 정말 아빠가 죄인이라는 게 강하게 깨달아지는 거야. 이래서 예수님 나의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거구나. 예수님이 존재 자체가 죄로 얼룩진 나의 모든 걸 용서해 주셨고 이게 바로 십자가의 은혜구나 라는 걸 빠가 진정으로 고백하게 된 거야.



그런데 말야, 예수님의 십자가와 용서의 은혜를 깨달아도 아빠가 누군가를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커지지는 않더라. 아빠가 큰 용서를 받아도, 아빠의 직장 상사, 또 아빠가 싫어하는 인간들을 매일 용서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어. 그리고 아빠에게 비인격적으로 말하고 심한 상처를 준 누군가를 용서하는 건, 마음을 먹는다고 될 일도 아니고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 그만큼 용서는 참 어려운 일이야.



그렇지만 어쩌겠니.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처럼 우리도 그렇게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사람임을 기억하는 수밖에. 하나님의 크고 큰, 헤아릴 수 없는 용서를 받은 사람임을 마음에 새기고, 나도 그 용서를 받았으니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는 수밖에.



무엇보다 용서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걸 기억하자 하이야. 내가 용서해야 그 사람과 관계없이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 그래서 오두막이란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 아빠가 이것도 적어왔단다.  



"용서란 너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


용서한다고 해서 네가 그 사람과 꼭 어떤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건 아니야. 그 사람과 상관없이, 네가 용서해야, 그 사람을 향한 미움과 분노의 덫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새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거지.



세상에서 제일 힘든 건 용서이지만,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우리가 행복하게 충만하게 살아가릴 원하시는 분이니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걸 거야. 어쩌면 용서라는 날개가 우리가 자유롭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비결이 아닐까 싶어. 



아빠를 오늘도 용서해줘서 고마워 하이야. 너에게 용서를 받은 것처럼 아빠도 오늘 누군가를 크고 작게 용서하며 살아가야 하겠지?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 더 넓고 광활해 보이는구나. 저 하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더 넓고 자유한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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