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문화 담당자가 된 다음 처음 가졌던 궁금증
그런데 조직문화가 뭔가요?
부서에 배치받고 한참을 고민했다. 분명 담당 직무에는 '조직문화'라고 써져 있지만 도무지 조직문화가 뭔지 알지 못했다. 부서에서 오래 일한 선배들에게 물어도 속시원히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직원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는 문화"
"회사를 신뢰하며 자부심을 갖는 상태"
"야근하지 않고 워라밸이 보장되는 상황"
듣는 순간 '이거다' 싶은, 조직문화를 한 줄로 깔끔하게 정의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재미, 행복, 신뢰, 자부심, 워라밸 등등 조직문화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설명하는 내용이 사람마다 모두 달랐다.
내가 가졌던 궁금증은 시간이 지나고 한 권의 책을 만나면서 풀렸다. 바로 국민대 김성준 교수님이 쓴 <조직문화 통찰>이다. 일종의 조직문화 개론서로 조직문화 담당자라면 한 번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책에서는 조직문화의 대가 에드거 샤인(Edgar Schein)이 말한 조직문화의 정의를 소개한다.
조직문화는 한 집단이 외부환경에 적응하고 내부를 통합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집단이 학습하여 공유된 기본 가정(shared basic assumptions)으로 정의될 수 있다
경험상 에드거 샤인 교수의 정의를 이해하고 나서 조직문화를 이해하는 시야가 한층 더 넓어졌다. 지금부터 에드거 샤인 교수가 말한 정의를 함께 찬찬히 살펴보자.
1.'외부환경에 적응하고 내부를 통합하는 과정'이 조직문화에 어떤 영향을 줄까
혹시 '조직문화는 결과다'라는 명제를 들어본 적 있는가? 우리가 조직에서 겪는 수많은 현상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조직이 탄생한 시점부터 현재 시점까지 조직 내외부의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조직문화 통찰>에 나오는 롯데그룹의 예를 살펴보자. 롯데그룹은 빚내서 장사하는 차입경영을 극도로 싫어하는 문화가 있다. 많은 기업들이 적당한 부채를 레버리지 삼아 사업영역을 넓히는 것과 대조된다. 이런 롯데그룹의 문화는 창업주인 신격호 회장이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돈을 투자받아 공장을 세웠다가 미군 폭격을 받아 사업을 망할 뻔했던 일화와 관련이 있다. 신격호 회장은 빚 때문에 죽을 만큼 고생했던 기억 때문에 이런 말까지 남긴다.
"빚은 몸 안의 독과 같아서 결국에는 몸을 죽인다"
창업주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새로운 사업전략을 짜거나, 재무적인 목표를 설정할 때도 부채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눈치를 보면서 알아서 행동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롯데그룹에서는 차입경영을 싫어하는 문화가 형성됐을 것이다.
신격호 회장이 미군 폭격으로 공장이 불타 엄청난 빚이 남았지만 이를 극복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에드거 샤인 교수가 말한 "한 집단이 외부환경에 적응하고 내부를 통합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 해당한다.
2. 조직문화에는 왜 '공유'라는 특성이 있을까?
조직문화의 신기한 점은 누가 써서 벽에 붙여놓은 것 아닌데 어느 순간 조직 내 모든 구성원이 동일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드거 샤인 교수의 정의에는 '공유된(Shared)'이라는 단어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에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동료를 만나면 인사하는 문화가 있다. 처음에는 같은 부서도 아니고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문화가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같은 회사 사람을 만나면 인사한다. 아무도 나에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같은 회사 직원을 만나면 인사해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니 눈치껏 행동하게 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들듯 나에게 공유된 케이스다.
개인적으로 조직문화의 '공유'라는 특성을 잘 다루는 것이 담당자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문화는 조직 내에서 더 퍼지고 공유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반대로 좋지 않은 문화는 공유되는 원인을 찾아서 제거해야 한다. 물론 조직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이 복합적이라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3. 조직문화는 '기본 가정(basic assumptions)'의 영향을 받는다
한국사회에서는 어른을 만나면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는 문화가 있다. 인사하는 행위 속에는 '어른을 만나면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 전제가 스스로에게 있는지도 평상시에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그런 전제에 맞춰서 어른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고, 식당에 가면 물을 따라서 드리고는 한다.
방금 이야기한 사례에서 '어른을 만나면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전제처럼 사람들이 은연중에 '지극히 당연하게 믿는 것'이 바로 기본 가정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다 보니 사람들은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본 가정은 물속에 잠긴 빙하처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직 내 다양한 현상에 영향을 준다. 개인적으로는 친한 동료들에게 만물조직문화설을 주장한다. 조직 내 모든 현상은 조직문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나만의 진심 섞인 농담이다.
지금부터는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가상의 두 회사를 놓고 구체적으로 기본 가정이 조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자.
A회사는 '직원들은 항상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는 성선설에 기반한 기본 가정을 가지고 있다. 이런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시행하면 어떻게 될까? 당장 직원들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불안해하지 않고 믿고 맡기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매일 업무 일지를 작성하거나 불시에 줌 회의를 하는 등의 감시를 위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B회사는 '직원들은 게으르며 시간만 생기면 놀 궁리만 한다'는 성악설에 기반한 기본 가정을 가지고 있다. 이런 회사에서는 재택근무를 시행하면 어떻게 직원들을 관리 감독할 지부터 궁리할 것이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시간 단위로 무엇을 했는지 업무 일지를 작성해야 하고, 관리자는 불시에 줌 회의를 소집해 자리에 있는지 감시한다.
똑같은 재택근무를 놓고도 어떤 기본 가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직문화는 조직 내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벤처 투자가 피터 틸(Peter Thiel)이 에어비앤비에 1억 5000만 달러 규모의 시리즈 C 투자를 한 후 '문화를 망치지 말라(Don't fuck up the culture)*고 조언했던 것도 조직문화가 회사 전반에 영향을 주며, 그로 인해 회사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여기까지 글을 읽은 사람 중에 조직문화 담당자가 있다면 이제 어디 가서 아는 척 좀 하자..! 보고서를 쓸 때 기본 가정이라는 단어도 살짝 써주고, 에드거 샤인 교수 이름도 자주 팔아먹자. 뭔가 굉장히 많이 아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흔한 말로 있어 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일할 때 삽질을 덜 하게 됐다는 점이다. 업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었고, 똑같은 일을 해도 조금 더 디테일하게 계획할 수 있었다. 경험이 아직 부족해서 실행 단계에서 미숙한 경우가 많지만 최소한 이제 방향은 맞게 설정한다. 업무에 대한 '감' 정도는 생겼다고 할까.
앞으로는 경험을 더 많이 쌓아서 다양한 문제 상황에 맞는 솔루션을 내놓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이론적 지식이 반드시 바탕이 되어야 한다. 조직문화 담당자로 무슨 일을 했는지 적는다고 하고는 대뜸 이론에 관한 글부터 적은 건 그런 이유에서다.
덧1. 이 글을 쓰고 나서 지금까지 했던 업무 대부분을 '퍼트리기'와 '제거하기'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 2. 조직문화 담당자가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면 <조직문화 통찰>을 꼽는다. 조직문화에 관한 학술적인 이론과 실무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점을 균형 있게 담았다. 김성준 교수님은 개인적으로 기회가 되면 꼭 만나보고 싶은 인물 1순위다.(팬심 충만)
참고자료
- 김성준, <조직문화 통찰>, 클라우드 나인
- 북저널리즘, <startup playbook, 조직을 단단하게 만드는 힘>
-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화학5사 중 롯데케미칼 부채비율 최저...한화솔루션 외 4개사 100% 미만>, 2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