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에서 피어나는 우연
삶은 계획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뜻밖의 순간이 문득 다가올 때, 우리는 준비하지 않았음에도 깊은 기쁨을 얻곤 한다. 몽테뉴의 말처럼 "삶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뜻밖의 기쁨을 만난다." 나는 그 문장을 인제 자작나무 숲에서 확인했다.
몇 해 전 봄날이었다. 남편과 자작나무 숲을 걸었다. 하얀 나무들이 연초록 잎을 달고 끝없이 이어진 풍경은 장관이었다. 마치 어느 동화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하얀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초록 맑은 공기가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초록과 하얀색으로 덧칠한 자작나무 숲에서 끝없이 '좋다'를 반복했었다. 그렇게 말하고 걷다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평소 같으면 검색창을 열어 '맛집'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마당이 넓은 집에 작은 간판이 걸린 소박한 식당. 내부는 꽤 넓어 보였지만 평일이라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메뉴는 단출했지만, 주인의 손맛은 놀라웠다. 특별한 재료도 아닌데, 음식맛은 정직하고 깊었다. 두 명뿐인 손님을 위해 금방 지은 찹쌀 섞인 솥밥은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다. 들기름에 조물조물 정성으로 무친 봄나물들, 그리고 깊이 숙성된 된장찌개까지. 어느 하나 까탈스러운 음식이 없었다. 식탁 앞에 마주 앉은 우리는 알았다. 이것은 계획으로는 만날 수 없는 맛, 그날 그 밥집 주인의 손맛을 만난 건 우연이 준 선물이라는 것을.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미리 정해 두지 않아도, 비워둔 자리에는 좋은 것이 들어온다. 너무 안달복달하지 않고,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마음 한구석 비움의 자리엔 언젠가는 우연의 선물이 올 수 있다고.
하루키는 <나는 달리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말했다. "달리기는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준다. 하지만 어디일지는 달려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글쓰기와 삶도 다르지 않다. 길을 걸으며, 써 내려가며,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돌아보면 내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숲길의 갑작스러운 바람, 이름 모를 식당의 따뜻한 밥, 준비 없이 흘러나온 대화, 계획에는 없었지만 삶을 풍성하게 만든 순간들이다.
"우연은 삶이 주는 가장 은밀한 선물이다."
나는 요즘 다짐한다. 모든 것을 계획하려 애쓰기보다 조금은 비워 두자. 즉흥의 여백을 열어 두자. 그래야 삶은 또 다른 선물로 나를 데려가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