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르쳐준 편안함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며 오래된 것들의 힘을 다시 떠올렸다. 주인공이 낯선 진실 앞에 서서, 계산된 삶보다 서툴고 불편한 사랑 속에서 진짜 가족의 온기를 배워가는 모습은 오래된 골목길을 걸을 때 느끼는 감정과 닮아 있었다. 반듯하게 정비된 도시는 편리하지만, 삶의 이야기가 담긴 낡은 벽돌과 울퉁불퉁한 길바닥이 주는 위안은 거기서만 얻을 수 있다.
가끔 걷는 오래된 골목길이 그렇다. 비좁고 울퉁불퉁해 불편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깃든 흔적 덕에 마음이 풀어진다. 반듯하게 새로 포장한 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편안함이 그 안에 있다.
내 삶에도 그런 오래된 물건들이 있다. 세탁실 한쪽에 놓인 나무 와인 박스는 벌써 5년째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이사 오던 날, 단골 GS마켓 아주머니께서 내가 나무상자를 좋아한다는 말에 "그럼 이거 가져가요"하고 웃으며 흔쾌히 내어주셨던 박스다. 그 안에는 그날의 다정한 미소와 함께 흐른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투박하고 낡았지만 세월을 버텨온 나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다.
엄마가 여전히 쓰시는 대나무 채반도 그렇다. 며칠 전 제사 음식으로 전을 부쳐 올려놓았는데 삐죽삐죽 나온 대나무 살들이 흘러온 세월처럼 느껴졌다. 엉성하고 불편해 보이지만, 그 채반에는 엄마의 오랜 손길과 추억이 배어 있어 쉽게 버릴 수 없다. 서울살이를 하시면서도 봄나물, 고사리, 고구마말랭이 등 온갖 식재료가 그 채반 위에서 햇빛과 엄마의 온기로 만들어진다.
베란다의 화분들도 내게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며칠 전 가을꽃들을 정리하다 오래된 토분에 낀 이끼를 보았다. 그 초록빛이 꽃과 내가 함께한 계절의 흔적으로 보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깨끗한 새 화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낡아 보였지만, 그 이끼 속에는 나와 꽃이 함께한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편리함만을 좇아 새것으로 바꾸려 했다면 이런 위안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되어 더 깊은 편안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늘 발전과 세련된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오래된 것의 불편함이 오히려 편안함을 준다. 도시의 반듯한 대로보다, 세련된 도시 풍경보다 오래된 골목길이 주는 안도감, 반짝이는 새 그릇보다 손때 묻은 채반에서 느끼는 따뜻함. 사람들의 삶이 켜켜이 쌓인 골목길이 내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늘 반듯하게 다듬고 빛나야만 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삐죽삐죽 드러난 엉성함이, 이끼처럼 낀 흔적이, 우리가 살아낸 시간을 말해 준다. 오히려 그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말했다.
"낡은 것은 쓸모를 다한 것이 아니라, 오래 살아남아 우리 곁에 남은 것이다."
오늘도 나는 오래된 것들 곁에서 마음을 내려놓는다. 낡음 속에서 배우는 위로, 그것이야말로 내 삶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힘이 아닐까 싶다.
(독자 여러분 추석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