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한중록을 통해 본 혜경궁 홍 씨의 삶
자녀로서의 삶②
[입궁 이후]
혜경궁이 세자빈이 된 후 혜경궁의 친정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길을 걷게 된다. 혜경궁의 어린 시절 소망이 하나둘씩 실현되어 갔던 것이다. 아버지 홍봉한은 이제껏 계속 낙방했던 과거였지만 혜경궁이 세자빈이 된 이후 영조 20년, 갑자년에 과거에 급제한다. 작자는 부친이 왕실과 사돈이 된 까닭으로 높은 벼슬에 올랐다는 사람들의 말을 인식해서인지 한중록 곳곳에서 그가 신하로서 크게 쓰일 재목이었던 것을 선희궁의 입을 빌려 강조한다.
부친이 등과 하신 지 칠 년 만에 대장의 직임까지 하셔서 공명이 혁혁하시매 남들은 “왕실의 근친이 돼서 그렇게 되었다” 하겠으나, 선희궁께서 나에게 조용한 때에 친히 하신 말씀이 있다. “어장께서 성균관 장의로 승문당 입시하던 때 상감께서 처음 보시고 안에 들어와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크게 쓸 신하를 얻었으니, 장인 홍 아무개가 그 사람이라’ 하시더라” 이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때부터 부친을 대왕께서 사랑하셨던 것이며, 어찌 내 부친이라 해서 특별히 중요하셨으리요. (「한중록」, 혜원출판, 2004, p.94)
이것만 보더라도 홍 씨 일가가 갑자기 큰 권세를 누려 세간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작자는 부친이 벼슬에 큰 뜻이 없음을 재차 강조한다.
그 해 2,3월에 연달아 이천보, 이후, 민백상 세 정승이 죽고 영묘의 병환이 있으셨다. 대신이 없는지라 3월에 선친께서 의정 벼슬을 하셨다. 당신의 처지로나 나라의 형편으로나 본심으로나 어찌 벼슬을 하여 출근하고자 하시겠는가. 하지만 선친계서는 휴척지의와 사생지심으로 그때 당신이 물러나시면 세상의 도리와 인심이 더욱 하나도 믿을 것이 없을 줄로 헤아리시고...(후략) (「한중록」, p.111~112)
작자는 이처럼 입궁한 후부터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부모-정확히 말하면 부친,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보호한다. 탄탄대로의 길을 걷던 그의 부친도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위기를 맞게 되는데 뒤주를 드린 게 바로 홍봉한, 작자의 부친이라는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제까지 차분했던 혜경궁은 다소 격앙된 어조로 그들을 책망한다. 부친은 임오화변이 있던 날 그 자리에도 없었을뿐더러 나중에 이 일을 알고 기절까지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시고 끝까지 나라와 세손의 안위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런 내막을 모르고 부친에게 뒤주를 드렸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혜경궁은 ‘놈’ 또는 ‘그것들’이라는 낮춤말을 사용하여 책망한다.
한 편의 의견이 영묘의 처분이 거룩하시다 하여 선친만 죄를 삼으려 하여 뒤주를 드렸다 하니...(중략) 이런 말을 하는 놈이 영묘께 정성을 다 하였는가, 경모궁께 충절을 다하였는가 모르겠다. 그것들은 선왕께서 ‘모년의 일을 위하노라’하시면 이런저런 말을 하여 용서하시며, ‘모년 모일에 시비가 있다’하시면 죄가 있건 없건 간에 선왕의 입으로 ‘그렇지 않다’고 못하신다는 것을 이용하였다. 모년(임오화변)의 일을 가지고 기회로 삼아 저희 뜻대로 조작하고, 이리하여 사람을 해하고 저리하여 충신이라 자처하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으리오.
(「한중록」, p.144~145)
임오화변 이후, 혜경궁 홍 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계속해서 모함에 모함을 받게 되고 결국 정조 재위 시에 그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이에 대해 작자는 ‘모두 불초, 불효한 나를 두신 때문이니 나는 뼈를 갈아도 이 불효는 속죄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탄하고 또 한탄한다. 그리고 작자는 죽는 날까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노력한다. 이 <한중록> 역시 많은 목적이 있겠지만 아버지를 비롯한 그의 친정의 누명을 벗기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만일 한중록의 '閑'을 '恨'으로 볼 수도 있다면 그 ‘恨’은 남편을 잃은 아녀자의 ‘恨' 보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그냥 아버지를 돌아가게 한 한스러움이 그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혜경궁 홍 씨에게 이처럼 아버지란 존재는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이며 애정의 대상이었다. 어려서 궁에 들어와 갖은 시련을 겪은 혜경궁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이자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홍봉한은 70의 나이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혜경궁 홍 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작자의 유일한 희망인 세손이 보위에 오르기까지 작자를 도왔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해 혜경궁은 늘 고마워했고 보답하고자 했으며 결국 이 <한중록>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과연 ‘작자가 부친에 대해 심리적으로 애정 교착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분석이 나올 만큼 그의 아버지에 대한 효성과 사랑은 여타의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리만큼 깊고 컸다. 이것은 작자 평생에 아버지 외에는 ‘의지할 대상’도 ‘사랑할 대상’도 없었던 인간 혜경궁 홍 씨의 외로운 인생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