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주무르는 그녀의 마조히즘
3화 남자를 주무르는 허영미
허영미에게 득두의 선물을 전달할까, 뜯어버릴까 많이 망설였다.
마분지 포장지에 어설프게 포장된 묵직한 질감이 느껴졌다. 내가 이 선물 주인에게 전하지 않아도 왠지 탄로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선물을 빼앗긴 기분마저 느껴졌다.
앉은뱅이 책상 바닥에 주저앉아 선물꾸러미를 한참동안 만지작거렸다. 포장지가 쉽게 뜯겼다. 저절로 살짝 벌어진 포장은 어차피 열려야 할 판도라 상자였다. 판도라 상자의 비밀스러움은 탄로날 운명이었듯
득두의 선물은 나의 책상에서 열려야 했던 운명이었다.
설레임은 고열 환자의 신음보다 고약한데,
거기에 질투까지 더해진 며칠간의 일상은 거의 휘청거림이었다.
이미 설레임은 득두가 산산조각 내주어 실망으로 돌아선 마음이 오히려 덜했다.
이 설레임과 실망의 무게를 저울도 잰다면 설레임이 훨씬 무거울 것이다.
호기심이 설레임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판도라 선물꾸러미는 활짝 뜯겼다. J에게의 주인공이 쪼그리고 앉아 활짝 웃고 있었다. 가수 이선희였다. 동그란 안경테에 주황색 넥타이를 착용한 가수의 웃는 모습으로 가득찬 표지의 두꺼운 공책이었다.
공책의 스프링이 공처럼 통통 튕기며 내지들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납치한 공책에 J에게 가사를 가득 써내려갔다.
J 스치는 자전거 소리에
J 그대 지나가면
난 오늘도 외로워
그대 그리워하네
J 어제
J 만났던 모습은
내 가슴 속 깊이
얼룩져 남아있네
J 서글픈 가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J 나의 사랑은
달라질 예정이네
J 그래도 못잊어
J 아직은 못잊어
...
이렇게 내 마음을 J에게의 흐름에 놓았다. 헝클어진 마음이 흐물흐물해졌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허영미와 득두를 미워하는 시퍼런 마음이 보랏빛으로 바뀌었다. J를 그리워하는 대목에서 급하게 내리치는 드럼의 길고 빠른 드럼채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군데군데 들려오는 작은북의 채에 가슴을 시원하게 강타당한 기분이었다. 감정적인 마조히즘의 쾌감이 느껴졌다.
그 쾌감을 살려서 주인을 못찾아간 공책에 개사를 갈겼다. 낚아챈 이 공책을 일기장 삼을 심산이었다.
일기를 쓸 때 마치 도장을 파듯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습관이라 책받침이 없으면 뒷장의 내지에도 모조리 자국이 남는다. 득두의 마음과 손자국이 묻은 공책을 일기장 삼았다. 1시간 넘게 앉아 있었지만,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연필을 들고 그대로 오래동안 멍청하게 앉아있었다.
다음 날, 문방구에서 포장지를 구입하였다. 선물의 주인을 찾아줄 요량이었다. 스프링 공책의 첫 장에 적은 J를 흔적도 없이 뜯어내는데 성공했다.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등굣길에 허영미를 찾아갔다. 허영미와 득두의 사랑을 낚아챈 죄책감이 설레임과 질투로 경직된 감정을 부드럽게 이완시켰다.
아침 일찍 골목 어귀에서 허영미를 기다렸다.
휘엉청한 기와집 대문이 열리고, 플레어치맛자락이 나풀거렸다.
“영미, 영미, 허영미”
허영미에게로 쪼르륵 달려갔다. 허영미는 일상이고, 나는 목적이 있는 등굣길이었다. 목적이 있는 내가 사소한 말에도 리듬과 악센트를 넣자 허영미도 덩덜아 즐거워했다. 학교가 가까워지자 들고 있던 득두의 마음을 전할 골든타임을 노렸다. 이미 몇 가지를 놓친 흠집이 생긴 선물이라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초겨울로 접어든 날씨였지만 이런 복잡한 심정 때문에 손에서 땀이났다. 허영미의 손에 득두의 선물을 쥐어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연대장의 행렬이 다가왔다. 교복을 입은 남자 선배들이었다. 연대장 무리들은 마치 군대의 행렬처럼 근사했다. 교복자율화로 전환되던 시기의 교복과 자율복장이 공존하던 시기의 풍경이다. 연대장을 따라 움직이는 그 다음 서열에 해당하는 선배들이 몰려다니는 일종의 연대였다. 그런 인간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연대장이 우리 쪽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무런 이유없이 심쿵했다. 허영미는 학교 방향에서 흔들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는 척하며 연대장의 시선을 피했다. 허영미가 남자를 대하는 우아한 태도이다. 연대장의 눈빛에 압도되어 느린 걸음으로 걷는 나, 학처럼 우아하게 휘적휘적 걸어나가는 허영미.
연대장이 나에게 다가왔다. “야, 이것 영미한테 좀 전해줘라.”
연대장이 나에게 슬쩍 던져준 것은 보름달 빵이었다. 나를 득두의 선물꾸러기를 바닥에 슬쩍 흘리며 폴짝뛰어 겨우 보름달 빵을 두 손으로 받았다. 허영미가 거리를 두고 나를 곁눈질로 보는 파장이 느껴졌다.
연대장은 무리를 이끌고 감히 허영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연대장 오빠가 또 보름달 빵 갖다주래?”
자주 빵을 받아본 표정이었다.
허영미의 두 볼을 상기되었다. 하얀 피부에 복숭아빛의 두 볼은 빛나고 예뻤다. 나는 득두의 선물 가방에 보름달 빵을 넣어서 허영미의 손에 쥐어주었다. 허영미는 그 선물을 널릅받았다. 허영미는 보름달 빵 이상의 선물에 두 볼은 복숭아에서 사과로 바뀌었다. 왠지 선물의 출처를 구구절절 말하기 싫었다.
다시 허영미를 향한 죄책감이 온데간데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질투에 저주가 추가된 감정이 가슴 깊이 똬리를 틀었다. 어서 노연기 오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허영미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연대장이 허영미에게 유혹당한 것일까, 허영미가 유혹한 것일까?
오산희가 득두의 선물에 연대장의 선물을 합해서 준 행위는 어떤 반향을 나타낼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화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