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4
붓을 든 바람!
바람이 불었다.
소비와 접속의 시대에 꼭 필요한 바람이었다.
붓을 든 바람은
환상과 망각의 늪을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바람이었다.
꿈틀거리는 영혼의 유전자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지나친 소비가 인간의 영혼을 망각의 늪으로 빠지게 했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엇이든 소비하는 시대를 자연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스스로 소멸하는 듯 보였지만 자연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은 남겨두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마저도 소비하려 들었다.
"인간이 무서운 게 아니야!
무엇이든 소비하는 것이 문제야.
그리고
망각해 버린단 말이야."
화가는 걱정되었다.
순수예술 마저 소비하는 오류를 범할 것 같은 인간으로 보였다.
"설마!
꿈틀거리는 것까지 소비하지 않겠지.
난 말이야!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는 것까지 소비할까 두려워.
흙이 오염되고 공기가 오염된 것까진 참고 버틸 수 있었어.
그런데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작은 씨앗마저 소비해 버리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바람은 두려웠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생명의 씨앗마저 사라질까 두려웠다.
"캔버스에 숨겨야겠어!
콩나물처럼 보여도 좋아.
아니면
팽이버섯처렴 보여도 좋아.
가장 중요한 건
자연의 씨앗을 보존하고 생명이 잉태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
그것이 바로
바람이 할 일이야."
바람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향했다.
아직
남아있는 자연의 씨앗을 찾아야 했다.
그림 이홍전 작가
자연은
바람에게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자연의 소중한 생명들이 있는 곳까지 바람이 접근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바람아!
보잘것없는 땅 같지만 그곳에는 가장 소중한 것들이 있단다.
그러니
제발 그 선을 넘지 말아 다오!"
흙이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자연의 씨앗이 말하는 것 같았다.
"저는 자연을 지키는 바람입니다!
인간의 소비를 막고 접속을 막을 수 있는 바람입니다.
풀 한 포기라도
인간의 소비에 짓밟히지 않게 하려는 겁니다.
인간이 찾아온다면 흙먼지라도 일으켜 이곳을 지킬 수 있는 바람입니다.
걱정 마세요!"
바람은 인간처럼 무엇이든 소비하지 않았다.
더럽고 필요 없는 것만 가져가고 치워주는 바람이었다.
"아니야!
바람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자연은 망각하지 않아!
인간들처럼 망각하는 자연이 되었다면 이 세상에 풀 한 포기도 남아있지 않았을 거야.
지금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만 그것은 착각이야!
잘 봐!
꿈틀거리는 것들이 보이지.
그것은 자연을 지키는 생명의 씨앗들이야!"
자연은 바람을 설득하고 있었다.
"네!
꿈틀거리는 게 보여요.
자연의 영혼 같은 것!
인간의 눈을 속일 수 있지만 바람의 눈은 속일 수 없어요."
하고 바람이 말했다.
"그렇지!
바람의 눈을 속일 수 없지.
하지만
이것도 지키지 못한다면 다 소멸되고 말 거야.
서서히
자연이 소멸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멸되지."
"알아요!
눈에 보이는 것.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소멸된다는 것 알아요.
그래서
자연을 지키고 싶어요.
저는
자연을 치유하는 바람이고 싶어요.
자연의 씨앗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바람이고 싶어요.
자연을 지키는 바람!
자연이 의지하는 바람!
소비하는 인간의 마음을 절제하는 마음으로 돌려줄 바람!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마음까지도 치유해줄 수 있는 바람이고 싶어요."
바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연을 지키기 위한 바람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소비하는 자를 막을 수 없다!
그들은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소비하는 유전자를 가졌어.
사회가 만들었어.
아니
잘못된 문명이 만들어낸 부산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간을 탓하지 않아!"
"맞아요!
인간을 탓한다고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자연은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자연은
바람의 앞을 막지 않았다.
자연을 지키겠다는 꿈과 희망을 막을 수 없었다.
붓을 든 춤추는 바람!
생명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캔버스에 담고 싶은 바람이었다.
붓을 든 바람은 화가를 찾았다.
멀리
캔버스 앞에서 화가는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이봐!
시간을 소비하면 어떡해.
비켜!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이 맞군.
시간을 소비하고 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니.
한심하군!"
붓을 든 바람은 캔버스를 이리저리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
전 소비하지 않았어요.
망각의 늪에도 빠져 있지 않았어요.
사실은
순수예술에 접속하고 있었어요.
저를
정확히 모르면 말을 쉽게 하지 마세요."
화가는 바람이 단정 짓듯 말하는 게 싫었다.
"히히히!
아침부터 캔버스를 바라보며 순수예술과 접속했다고.
웃기는 소리야!
망각이나 환상에 접속하고 있는 것 다 알고 있어!
그런
순수예술이라면 꼼짝도 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 봐.
예술!
적당히 예술로 포장하고 무엇이든 소비하는 존재같이 내 눈에는 보이니까."
화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붓을 든 바람은 캔버스를 향했다.
캔버스에 닿을 듯 말 듯!
바람은 신령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바람이 춤추는 게 아니고 붓이 춤췄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붓 끝에서 튕긴 물감이 캔버스를 터치하고 접속했다.
사르르 녹아내리듯 물감은 살아 움직였다.
"그렇지!
살짝 얼굴만 보여줄까.
히히히!
아무도 생명의 씨앗 얼굴을 찾지 못할 거야.
이건!
자연만이 찾을 수 있는 얼굴이지!"
붓을 든 바람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허우적거리듯 춤췄다.
"사슴 닮은 얼굴!
아름다운 여인의 가슴!
이런!
더 이상 표현을 하면 안 되겠다.
생명의 씨앗이 위험할 수도 있어.
인간들이란!
모든 것을 소비한 뒤 망각의 늪에 빠질 테니."
바람은 붓을 내려놨다.
"이봐!
물 좀 떠 와."
바람은 목이 탔다.
"네!
알겠습니다."
화가는 물을 찾아 나섰다.
"히히히!
날 찾을 수 없을 거야.
영원히!"
바람은 캔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생명의 씨앗이 싹을 틔우는 순간까지 지켜줄 생각이었다.
"어디 갔을까!"
화가는 바람을 찾았다.
물을 줘야 하는데 바람이 없었다.
"바람님!
물 떠 왔어요.
어디 있어요?"
화가는 캔버스 뒤를 향해 외쳤다.
"이상하다!
그림이 움직였어.
아니!
내가 움직인 걸까."
화가는 놀랐다.
캔버스 안에서 바람 부는 소리를 들었다.
"설마!
바람이 캔버스 안에 들어갔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화가는 캔버스 앞에 손을 내밀었다.
물감을 만져볼까 하다 멈췄다.
아직
수분이 덜 말라 있었다.
화가는
캔버스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간을 소비하며 바람을 기다렸다.
아니!
바람을 찾았다.
"나는 붓을 든 바람!
자연의 씨앗을 지켜주는 바람!
나는 붓을 든 바람!
인간의 허황된 망각을 지워주는 바람!
나는 붓을 든 바람!
순수예술의 진실을 알려주는 바람!
나는 붓을 든 바람!
캔버스 안에 들어가 생명의 씨앗을 싹 틔우는 바람!"
캔버스 안에서 바람이 노래 불렀다.
생명의 씨앗들도 바람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영원히 사는 법!
바람이 찾았군."
캔버스 안으로 들어간 바람이 살짝 보였다.
붓을 든 바람을 화가는 찾았다.
보이는 경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상까지 바람은 넘나들고 있었다.
바람은
자연의 씨앗이 생명을 틔울 수 있도록 정성을 다했다.
가끔
대지가 메말라 있을 때는 화가를 불렀다.
물이 필요했다.
목마른 갈증을 해결한 뒤 또 캔버스 안으로 사라졌다.
자연은 시간이 필요했다.
붓을 든 바람이 필요했다.
순수예술 앞에서 멍 때리는 화가도 필요했다.
자연이 생명을 잉태하고 싹을 틔울 때는 무엇이든 다 필요한 존재였다.
붓을 든 바람은
순수예술을 지켜주는 바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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