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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지 Mar 16. 2016

17. 석고대죄

스탠딩

1.

나는 일출을 보고 와선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기로 했다.


내가 밖에 다녀오고 차까지 마시는 동안,

내 동생은 그 전날부터 이어져온 강행군에

여전히 일어나지 못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깨웠을 때의 동생은

순전히 나의 정성 때문에

겨우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겨우 일어난 동생과 나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오늘이 시즌 마지막 서핑이니까.



2.

각자 웻수트를 입고 서핑보드를 들고

해변으로 갔다.


한 눈에 들어오는

한적하고 깨끗한 바다가

우리들만을 위한 것처럼 보였다.


10월의 하조대 바다는 여전히 깨끗하고 빛났다.


수트에 묻은 모래 씻으러 간 나. 맑은 하조대 바닷물/ 서피비치 2015년 10월/ 출처: 김은비



3.

깨끗한 바다의 모습에

피곤한 기분은 금세 잊어버렸다.


2주 전 보다

바람과 바닷물이 시원했다.

하지만 햇빛은 여전히 강했다.


마냥 더운 여름도 아니었고

쌀쌀한 가을도 아니었다.

오다가 본 가을의 풍경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환절기도, 간절기도 아닌 상태.

10월 서핑에서 처음 경험한 계절이었다.



4.

동생과 한 커플이 서핑 체험을 듣게 되었다.

나는 나대로 한쪽에서 개인 연습을 시작했다.


해변에 와

깨끗한 해변에 넋 놓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들어가려니

조류와 거친 파도 때문에

라인업까지 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파도를 기다려보고

테이크 오프도 시도해 봤다.

영 되질 않았다.


발전 없는 내 실력에 연습이 지루해졌다.

나의 쉬는 시간이 되기도 했고,

동생 혼자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것도 왠지 마음에 걸기도 해

해변에 나와 동생의 수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같이 들어가진 못해도 지켜봐줘야지' 하다가

동생이 수업받는 걸 멀리서 사진 찍어주기로 했다.


↑서핑 체험 중인 강사님, 수강생들, 내 동생/ 하조대 서피비치 2015년 10월/ 출처: 김은지


멀리서 형체만 보이는 동생.

사진을 찍어주려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 사진기 앱에서 잔뜩 확대 해 사진을 찍으려 했다.

하지만 동생의 동작만 보일 정도로 거리가 멀어 잘 찍히지 않았다.

'일단 찍어놓자.'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데...


왠지 동생이 우는 것 같았다.


동생 앞으로

맥주 거품이 쉬지 않고 몰려오고

서핑보드는 자꾸 파도에 솟구쳤다.

가만히 서있으려 해도

파도가 동생을 자꾸 밀쳐냈다.


그 상황과 서있으려 노력하는 동생을 보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동생의 얼굴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우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에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5.

나의 10분 휴식시간이 끝났다.


거친 파도에

나는 서핑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서서

한참을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연거푸 다가오는 맥주 거품 파도에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겨내지 않으면

다신 서핑을 못 할 것 같았다.


나를 달래고 달래

한 5분 서있다가 들어갔던 것 같다.


서핑 체험하는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멀리서 보던 맥주 거품 파도가

계속 이어지는 걸 가까이서 보니

무서울 지경이었다.

질렸다.


동생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얼굴은 말 그대로 '울상'이었다.

나는 동생이 진짜 울상인 걸 확인하니

더 웃음이 나왔다.

괜히 동생에게 미안해져

서핑보드에 올라가는 노하우* 같은 것을 알려주었다.


울상인 동생을 응원한 후

동생의 서핑보드를 밀어주던 강사님에게 갔다.

나는 오늘 파도가 너무 거칠지 않냐고 말했다.

"저 쪽으로 피해서 라인업 가세요."라는 강사님.

그 얘기에 나는

'이 분은 서핑 로봇인가?' 싶었다.


*배우기로는 '서핑보드 레일 양쪽에 손을 짚고 올라가라'고 배웠다. 하지만 나는 그럴 경우 팔 힘도 부족하고 균형도 잡기도 어려웠다. 서핑보드 한쪽 레일 옆 중간에서 반대편 레일을 두 손으로 잡고 당기듯이 서핑보드를 끌어와 상체를 보드 위에 놓은 후 서핑보드에 납작 붙어 기어 올라간다. 서핑보드를 물에 띄웠을 때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이 방법을 쓰는 서퍼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6.

맥주 거품을 뚫고

다시 들어간 바다에서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테이크 오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파도의 타이밍에 맞춰 일어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

테이크 오프 할 때

균형을 잃는다는 게 문제였다.


빠른 테이크 오프가 능사라 생각했었다.

(물론 빨리 하지도 못했지만.)

하지만 지난번 대회를 보니

오히려 테이크 오프 속도보다는

움직이는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일어나는 능력이

서핑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이 이번 시즌 다섯 번째 즈음 이었나?'

나는 서핑을 다섯 번 온 것으로

테이크 오프를 바라지 말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남은 시간은

움직이는 바다 위 서핑보드에서

서는, 서있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7.

서핑 체험하던 날 배운,

가장 기본이 되는

테이크 오프의 과정.

그중에서도

엎드린 상태에서

서핑보드에 손을 짚고 서는 걸

바다 위에서 해내기로 했다.


휴식 시간 전에 힘을 다 썼나는지

그 과정은 단번에 끝나지 않았다.


강사님들이 말하던

'지은 죄가 많은 상태'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서핑보드 위에서 '석고대죄' 중인 나/ 하조대 서피비치 2015년 1월/ 출처: 김은비


서핑보드 위에서

무릎 꿇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연습을 계속하자

서핑보드에 무릎도 꿇기 전에

균형을 잃고 물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유연하지도

균형 감각도 없는 나.

...근력도 없었다.




다음 글, 2016년 3월 23일(수) 발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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