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마음에 남은 자국, 흔적이다. 삶이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물처럼 흘러가면 좋겠지만, 이따금은 삶이 나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무는 움직일 수 없고 오직 환경에 적응하며 성장할 뿐이다. 인간은 물이나 나무는 아니지만 물이나 나무와 DNA를 나눠 갖은것은 맞다. 거슬러 오르거나, 완벽하게 미분하면 우리는 모두 탄소이기 때문이다. 삶의 첫 기억을 해보면 어느 하나가 떠오르지 않는다. 계절에 따라 떠오르는 마음의 자국들이 다르다. 선명한 어느 봄날의 기억이나, 여름날의 기억도 불쑥 떠오른다. 내 삶의 첫 기억을 차분하게 떠올려 본다. 어느 봄날이 생각난다.
아마 우리 집은 이사를 하고, 부모님과 기념사진을 찍은 듯하다. 마치 이전의 기억이 흑백 사진 같이 흐렸다면, 이날부터 컬러의 ㅁ시대가 된 것처럼 그 쨍한 낮의 눈부심이 선명하다. 다섯 살쯤의 오빠가 세 살쯤의 내 어깨를 다정하게 잡고 둘이 집 대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엄마는 아주 여러 번 여기를 봐, 여기 봐 이렇게 말하는데 나는 너무 눈이 부셨다. 눈이 부셨을 뿐인데 웃어야지 하는 말에 겨우 눈을 뜨고 입을 삐죽 내밀던 날의 기억이다. 박제된 추억치고는 선명하다.
나의 어린 날, 첫 기억들은 마치 여러 장의 편지처럼 한 움큼씩 생각난다. 봄날이고, 열린 대문 안에는 큰 우물이 있었으며, 젊은 엄마는 바쁘게 여기저기를 다니느라 자주 내 곁에 없었다. 나는 집 앞 흙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를 따라 땅바닥에 얼굴이 닿도록 개미들이 무엇인가를 물고 이동하는 동선을 자세하게 관찰했다. 쫑긋한 더듬이와 잘록한 허리를 가진 아주 작은 개미의 몸놀림은 놀랍도록 날렵해서 나는 자주 개미들을 놓쳤다.
네 살의 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몸이 아팠는지 시간을 맞춰 쓴 약을 먹었으며,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소아 병원이 없었다.엄마에게 업혀 한참을 버스를 타고 영등포의 김내과라는 병원을 다녔던 기억이 있다. 현재의 병명으로는 A형 간염이었다.나는 소아 간염 환자였던 것이다.
보리죽을 먹었고, 방안에는 이제 막 배밀이를 하기 시작한 남동생이 웃으며 신나게 나를 향해 돌진했다. 동생은 엄청난 속도로 배밀이를 하다가 목표 지점인 내 품에 안기면 참았던 침을 내 얼굴에 비볐다. 그러다 기운이 빠지면 그대로 얼굴을 방바닥에 찧기도 했는데 목청껏 아기가 울면 나는 괜히 혼이 났다. 시계를 읽을 줄도 몰랐는데 긴 바늘과 짧은바늘이 겹쳐지거나 완전히 펴지면 약을 먹었다. 약을 먹고 아기와 놀다가 어느 날 벽을 잡고 걸어오는 동생을 보았는데 동생의 머리카락들이 신기하게도 모두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그 모습이 웃겨서 웃기 시작했는데 동생이 내 웃음을 따라 웃을 때 하얀 이가 두 개 솟아 있었다. 몽글몽글한 간지러운 마음이 들었고, 반달 같은 동생 눈이 예뻐서 동생을 꼭 안아주었다.
나는 온통 호기심이 많아 할머니에게 하루종일 묻고 또 물었는데 대답을 그럴싸하게 해 줄 어른이 없어 할머니가 고통을 당하셨다. 우리 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가 많았다. 할머니가 어렸을 때 만난 서당개 삼 년의 이야기나, 할머니의 아버지이신 서당 훈장님의 인품이나, 사서삼경과 같은 한문 책들의 고상함은 재미가 없어 나는 곧 그림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왕자파스라는 이름의 크레파스로 스케치북에 따라 그린 민들레와 개미집들, 우물의 둥근 이음새, 비포장 도로의 황토흙, 전봇대를 지나는 하늘 가득한 전깃줄들을 한가득 그렸는데 관심을 가져주는 어른은 없었다. 동네에는 아이들이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저녁때까지 하면서 돌아다녔고, 여자아이들이 거의 없어 나는 세상에는 오직 동네의 한부류의 아이들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비록 한 때였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목청과 구슬치기의 집중력을 가진 나는 종종 아이들의 전재산을 따기도 했다.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의 빛나는 시간도 끝났다. 생애 첫 기억을 생각하면 이가 다 빠지신 나의 유식한 할머니와 엄마등에 업혀 다니던 병원의 소독약 냄새, 다섯 살의 오빠가 내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고 사진을 찍으려 포즈를 취하던 기억들이 툭툭 떠오른다.귀여운 내 동생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씽씽 달리면 어디선가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