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멋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신도시에 성당을 짓고 내부적으로 남은 여러 과제들을 해결할 때 얘기다. 나는 아직 젊었고 신앙은 뜨거웠다. 세상 물정을 좀 알게 된 무렵이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은 새로 건립한 성당의 기획위원회의 과제였으며, 오직 봉사로 모였지만 추진하고 해결해야만 할 일들이 많았다. 공동체에서 과업이 갖는 추진력의 원천이 아이디어와 행동뿐만 아니라 협업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회 조직이 갖는 맛을 성당 봉사단체의 활동으로 알게 된 것인데, 조직의 맛은 쓴맛이었다. 사회생활의 맛은 개인적인 가정의 인간관계와 달라서 끊임없이 내가 속해있는 위치와 업무의 카테고리를 의심하게 했다. 손과 발이 되어 성당 청소를 하거나 만두를 내다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이 요구됐다.
집중이란 선택의 행동이다. 공동체에서의 선택이 주관적이 아닌 철저히 객관적인 어떤 것이길 바랐으나, 일부 주관적 선택들도 마구 녹아서 선택 속에 들어갔고 나는 지쳤다. 젊어서 지치는 속도가 빨랐을지도 모른다. 조직의 쓴 맛을 본 나는 집중한다는 것에 신중해졌다.
나의 모든 집중은 내게로 향했다. 심지어 아들과 딸의 어떤 결정적인 결정의 기로에서의 선택지를 내가 정하지 않는 신중함으로 보이는 모호한 선택을 선택했다. 나는 나를 선택했으므로 내가 결정권을 갖는 선택에 집중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순수한 내 에너지의 쓰임이다.
그때는 산만해 보였고 지금은 다재다능하게 보이는 나에 대한 나의 결정권이다. 요즘 내가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것은 글쓰기다. 매일 쓰는 글에 집중한다. 젊은 날에는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하면서 내 안의 나와 만났다.
이제는 작가가 된 나를 만나고 싶다. 작가는 읽고 쓰는 사람이다. 나의 이 선택은 쓰는 행동의 실천을 요구한다. 오늘도 글쓰기에 집중하고 싶다.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훅 들어오는 업무에 쓰이지만 마음의 일부는 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기만 하다.
하루를 천년처럼 산다고 상상해 본다. 들이마시는 호흡에 나의 글감을 저장하고 내뱉는 호흡에 글을 쓰리라. 시간이 내 호흡의 문장을 묶어 책으로 내어주면 좋겠다는 생각과 같은 상상이다. 잠시라도 이런 상상의 집중 안에서 푸릇하고 맑게 빛나는 나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