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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로암 Oct 25. 2024

걷기의 목적

2024년 22회 신라의달밤165리걷기대회 풀코스 완주후기

 하늘을 올려다보니 다양한 그라데이션의 회색 구름이 보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검은 나뭇잎들이 파스스 음산한 소리를 내고 그 사이로 내가 가야 할 악마의 손톱처럼 시커먼 길이 있다.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조금 전 사람들이 가득한 길을 걸을 때 유동적 움직임이라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걷지만 속도가 조금씩 달라서 뒤에서 따라가다보면 반드시 틈이 벌어진다. 그 틈을 요리조리 파고들며 빠른 속도로 걸었다. 성질 급한 혈액 속의 적혈구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길이 갈라지고 사람들이 훅 줄었다.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없다는 편안함과 멀고 어두운 길을 혼자서 가야한다는 두려움이 같이 왔다. 괜찮아 H가 달아준 조명과 Y가 사준 든든한 갈빗살이 있어. 내가 위험해지면 바로 달려와 줄 S도 근처에 있으니까.      


 겁을 잔뜩 먹고 어깨를 움츠리면 나중에 어깨가 엄청 아플거야. 어깨 힘빼. 어깨를 크게 빙빙 돌린다. 우두둑 소리가 난다. 완전히 산길로 접어들어 주변이 더욱 조용해졌다. 빨간 불빛 두 개가 앞에서 조금씩 움직이며 나아가고 있다. 나는 그들을 따라잡았다. 이제 내 앞에 빨간 빛이 없다. 새까만 나무가 가득한 길이 있을 뿐.      


  갑자기 눈 앞에 커다란 사람이 나타나서 흠칫 놀랐다. 곰인가 했는데 차림새를 보니 참가자인 듯 하다. 왜 거꾸로 오지. 벌써 포기인가. 이럴거면 30km를 신청하지. 그 사람이 내려가는 아쉬운 발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드니 저기서 뭔가 어른거린다. 무심결에 뒤돌아보니 뒤에 아무도 없다. 앞에도 아무도 없다. 저 어른거리는 것은 분명 사람일테지만 확실히 확인하기 전까지 나는 계속 이렇게 어깨를 움츠리고 걸어야겠지. 속도를 높였다.     


 확인결과 참가자분이었고 그 분의 헤드랜턴으로 가로등이 없는 산길을 안심하고 올 수 있었다. 그 분은 내가 당연히 남자인줄 아셨다가 인사를 하자 여자라서 놀랐다고 했다. 산길을 걷는 동안 만난 참가자는 대부분 남자들이어서 백년찻집의 남자화장실은 줄이 엄청 길었고 나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화장실을 썼다.


 흩날리는 비를 막기 위해 쓰고 있던 모자에서 땀이 굴러떨어진다. 숨소리는 거칠고 다리는 뜨겁다. 그제서야 내가 오르막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결심을 해야했다. 힘들어도 한번에 오른다. 중간에 쉬지 않는다. 심장이 목구멍 근처에 다가왔다. 오르막의 끝에 사람들이 앉아있다. 나도 그들의 옆에 털썩 앉는다.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순수하게 힘들어서 울고 싶어졌다. 힘들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힘들어서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해서 당황스러웠다. 결정을 해야했다. 울 것인가 말 것인가. 울자. 울어버리자. 울기로 결심하고 눈 근육을 풀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신체반응을 사회적 학습이 막고 있다. 나는 쉽게 울 수 없구나. 웬만해선 울지 못하는구나. 그래 아직 30km밖에 안와서 그럴거야. 30km로는 울지못하는 나는 몸을 재정비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결국 눈물이 터져나온 것은 60km를 넘은 지점에서였다. 다리가 너무 아팠지만 쉴 수가 없었다. 쉬고 나서 다시 걸을 때 고통이 더 심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참아야 할 고통이고 내가 돈 주고 산 고통이다. 너무 아픈데 계속 해야하는 딜레마에 갇혀 어쩔줄을 모르며 걷다보니 눈물이 슬금슬금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 울면 안된다는 자아가 눈물을 가로막았다. 꺼져. 나는 좀 울어야겠어.     

          

 서방에게 전화를 했다. 서방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막힌 댐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나의 빌어먹을 피로물질이 눈물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서방은 꺄르르 웃었다. 견고한 눈물의 댐을 열기 위해서는 서방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를 66km를 걷게 하여 얻고 싶었던 것은 이런 거였다. 완주따위. 내게 어떤 매개체가 필요한가.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나 자신에 대한 호기심이 삶의 원동력인 나에게 좋은 경험이었고 수확도 충분하다. 이 철저한 나르시시즘에 한숨이 나오기도 하지만 합법적이고도 건강한 이런 기회가 앞으로도 계속 다가올 것임을 알기에 나는 사는 것이 꽤 즐겁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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