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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21. 2023

휘뚜루마뚜루, 빌레로이앤보흐 부르겐란트

그릇장은 이미 포화 상태다. 이제 그만 사야지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보지만 그럼에도 눈앞에 아른거리며 꿈에까지 나오는 경우라면 그 욕망에 굴복해줄 필요가 있다. 그런 내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대개 빌레로이앤보흐다. 빌레인 것을 알고 수집하는게 아니라 어쩐지 예쁜데? 어쩐지 마음에 드는데? 하고 보면 대개가 빌레였다. 말 그대로 취향저격이다.

 

빌레 중에서는 맑은 노랑을 필두로 한 아우든 라인이 가장 인기지만 그건 접시 얘기고 내 취향도 아니다. 난 주로 티타임에 쓰이는 애들 위주로 그러모았는데 그 중 가장 자주 꺼내 쓰는 애들은 부르겐란트다. 아카풀코도 가지고 있고 올드 암스테르담도 가지고 있지만 부르겐란트에 가장 손이 많이 간다부르겐란트는 1930년대부터 70년간 생산되다가 2000년대 들어 단종된 라인으로 빌보의 스테디셀러이자 일명 독일의 국민 찻잔으로 통한다. 색상은 그린, 레드, 블루. 뒤로 갈수록 희소하다. 나는 그린과 레드로 각각 1조씩 가지고 있다.

 

생산 기간이 길다보니 생산 수량이 제법 되는데도 워낙 찾는 이들이 많아 구하기가 은근히 어렵다는게 특징이다. 그래서 ‘파잔’이라는 빌보의 다른 라인과 섞어 콜랙션을 만드는 경우도 제법 있다. 나 또한 디저트 접시와 컵, 컵받침은 부르겐란트로, 커피팟은 파잔으로 들였다. 둘은 얼핏보면 참 유사하다. 파잔이 독일어로 ‘꿩’이라는 뜻이어서 파잔 라인의 접시에는 꿩이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커피팟에는 원래 꿩이 없어 파잔임을 한눈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색감에 있어 똑같은 그린이나 레드여도 부르겐란트 쪽이 좀 더 따수운 느낌이 있다.

 

그렇지만 그건 정말 내 느낌일 뿐인지라 이 둘을 혼용하여 상을 차려도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는 힘들다. 이 둘을 구분하는 좀 더 객관적인 지표들이 있긴 하지만 그게 지금 내가 풀고싶은 얘기는 아니니 생략하기로 하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정작 내가 가진 애들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다. 분명 똑같은 부르겐란트인데 그린 색상의 컵받침과 레드 색상의 컵받침 사이즈가 다르다! 생산공정상의 오차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별개의 물건처럼 차이가 난다. 생산 시기나 생산 공장 등에 따라 컵받침의 사이즈가 달라진 적이 있는걸까? 아니면 색상마다 의도적으로 컵받침 사이즈를 다르게 만들었던걸까둘 다 진품인건 확실하기 때문에 더 아리송하다.

 

물론 둘을 한 상에 함께 놓아도 아주 눈썰미 좋은 사람이 아닌 한, “컵받침 사이즈가 다르잖아!” 라고 알아챌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다한들 “컵받침 사이즈가 다른 컵을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쓰다니 참 어지간하네 라며 핀잔을 줄 사람도 있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컵받침 사이즈의 진실을 알고 싶어도 이미 오래 전에 단종된 물건이고 엔틱 마켓에서 구한 물건인지라 문의를 해볼 곳도 마땅찮다. 오랜 세월을 거쳐온 물건이니 분명 사연이 있을거고 그 사연이 빈티지의 재미일텐데 알아낼 재간이 없다.

 

부르겐란트에는 새침떼기같은 케이크보다는 투박하기 그지 없는 호밀빵이나 막 썰어낸 바게트 따위가 잘 어울린다. 그리고 샐러드처럼 여러 색감이 섞인 음식을 올리면 굉장히 정신이 없다. 단순한 음식을 단촐하게 올린다는 원칙만 지킨다면 휘뚜루마뚜루 쓰기에 아주 좋은 녀석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 경우는 케이크를 먹는 일보다 호밀빵을 먹는 일이 더 일상적이기 때문에 유독 부르겐란트를 더 자주 쓰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아무튼 나는 부르겐란트의 그런 분위기가 정말 독일스럽다고 생각한다. 

 문득 독일에서 사먹었던 1유로짜리 돌빵이 생각난다. 그 시절 우리는 가방 하나에 유레일 패스 한 장만 덜렁 들고 스위스에서 독일로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향했었다그때 우리 신분에 스위스의 물가는 살인적이었다아끼고 아꼈지만 그럼에도 예산 초과였다지갑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물 한 병만 사마셔도 돈이 줄줄 샜다독일에 넘어오고나서야 약간 숨통이 트였다내 팔뚝만한 케밥과 카레가루를 뿌린 소세지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스위스에서 뚫렸던 구멍을 메꿔나갔다오스트리아로 넘어갈 때는 돌빵을 먹었다돌처럼 단단해서 내 마음대로 돌빵이라고 불렀기에 진짜 이름은 여전히 모르는 빵. 사이즈도 내 머리 사이즈만한 것이 무려 1유로였다덜컹대는 기차 안에서 가방 속에 넣어둔 1유로 짜리 돌빵을 아껴가며 조금씩 뜯어 먹었던 나는 이제 부르겐란트에 내가 직접 구운 키토빵을 올려 와구와구 먹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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