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드드 우웅~
거친 오토바이 소리에 잠이 깼다. 거실로 나오니 밖은 깜깜했다. 시간은 5시를 조금 넘겼다.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나가기가 망설여졌다. 그때 거실 창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래 출발이다!’
서둘러 세수하고 옷방에 걸쳐놓은 티셔츠와 운동복 바지를 챙겨 입었다. 휴대전화기와 손수건, 물통만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늦여름 새벽 시간은 평소와 달랐다. 밖을 나오니 시원하고 상쾌함마저 느껴졌다. 어디선가 쓱쓱 비질 소리가 들렸다. 이른 시간부터 단지를 청소하는 경비원 아저씨들이었다. 윙 하고 작은 전동차 소리도 들렸다. 요구르트 아줌마의 노란 전동차가 곧 눈에 들어왔다. 누구보다 이 새벽의 시작이 당연한 사람들이었다.
재이는 1년 전부터 주말이면 집에서 가까운 산으로 산책하러 갔다. 몹시 춥거나 더운 여름의 몇 주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었다. 이전에는 소화도 시킬 겸 동네를 걸어 다녔는데 어느 날 한 번 산에 다녀온 뒤로는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산은 살아있지만 시끄럽지 않았다. 재이의 숨소리, 걸음 소리마저 자연의 일부로 흡수했다. 그 소속감이 엄마 품처럼 편안했다.
‘이 좋은 산을 가까이 두고 나는 왜 몰랐을까.’
회원권 없이도 언제든 다닐 수 있는 이 건강한 공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단지와 연결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산 초입에 금세 다 달았다. 이른 시간이라 그곳에는 산만이 있었다. 길은 어두웠지만, 드문드문 노란 가로등 빛이 눈에 들어왔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을 밟아가며 산길을 조심스레 걸어 올라갔다. 조금씩 나무와 길의 형체가 선명히 들어왔다. 아직 남아있는 귀뚜라미 소리도 들렸다. 새들은 자는지 좀체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쯤 되자 너무 적막하기조차 했다. 마음이 조금 쪼그라들었다.
‘사람이라도 좀 다니면 낫겠는데….’
그때 멀리 아래쪽 길에서 까만 형체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귀, 귀신인가’
말도 안 되는 영화 속 이미지가 떠올랐다. 형체는 멀쩡한 사람 형상이 되어 그녀보다 먼저 산길을 올라갔다. 다 큰 어른의 머릿속에 귀신이라니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 이제는 눈에서 멀어진 발 빠른 등산객이 지나간 길을 천천히 따라 올랐다. 평지에 접어들자 멀리서 또 다른 걸음 소리가 들렸다. 벌써 다녀오는 길인지 반대에서 오는 길인지 부지런한 사람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에게 점점 다가오는 상황이었다. 갑작스레 두려움이 생겼다.
‘대낮 산길에서 묻지 마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남성이 일면식 없는 여성을 끌고 가.’
이번에는 뉴스 속 여러 사건이 물밀듯 떠올랐다. 이 길을 왜 왔나 왜 지금 왔나 무슨 일이 생기면 결국 내가 벌인 일이다. 온갖 생각이 갑자기 머리에 가득 찼다. 재이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숫자를 누르고 안 보이게 손으로 가렸다. 여차하면 통화버튼을 누를 셈이었다. 상대는 어느새 가까워졌다. 가까이 보니 재이보다 훨씬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 역시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지나쳤다. 조심히 뒤를 돌아보자 그 걸음으로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다시 휴대전화기를 내려보았다. '119' 숫자가 보였다.
‘아, 112로 해야 했었나.’
119에 범죄신고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이 길에서는 누구를 만나도 두려울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걷다 보니 생각보다 한참을 걸어온 듯했다. 앞을 향할 때보다 돌아가는 길은 훨씬 어둡게 느껴졌다. 앞서 걷던 사람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터덕터덕'
다시 재이의 발소리만 들렸다.
‘푸드득’
갑자기 어딘가에서 새가 날아올랐다. 재이는 깜짝 놀라 주변을 봤다. 어둠뿐이었다. 재이는 뛰기 시작했다. 뛰기 시작하자 심장이 뛰었고 그러자 더 두려워졌다.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헉, 헉’
'띠띠띠띠'
길 중간에 마을버스 (후진)소리가 들렸다.
재이는 멈춰 서 숨을 골랐다. 마을버스 종점 쪽으로 내려가 큰길을 돌아 집으로 가기로 했다. 마침 길을 올라오는 마을버스가 보였다. 종점에는 일찍부터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 몇 명이 보였다. 평범한 일상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온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보는 이 사람들은 안전해 보였다. 실제가 어떻든 밝은 곳에서의 우리는 적어도 상식적이다. 해가 떠오를 준비를 하는지 어둠이 빛에 밀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왔다.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여전히 자고 있었다.
모두가 그저 마음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끝.
(원고지 21.2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