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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주 Oct 23. 2023

없어져도 있는 것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비벼지고 허공으로 퍼집니다. 드디어 출장 일장이 끝났습니다. 저는 막힘없이 술술 말하다가도 말문이 막혀서 쩔쩔매고 그랬지요. 그럼에도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가치롭습니다.


새벽 비행은 괴로와요. 설핏설핏 선잠에 빠지기를 반복하다가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타야만 했던 공항버스를 눈앞에서 홀라당 떠나보냈습니다. 다음 버스를 잡아 탔는데 왜 이리 잠이 쏟아지던지요. 잠들면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아서 눈을 부릅뜨고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익숙한 동네가 왜인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온도도 색깔도 모두 변해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제가 하는 말도 내일의 행동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완벽한 선택 또한 없고 매 순간 정확한 균형과 조화를 이룬 상황을 기대하지 말아야 할 텐데요.


눈코 뜰새 없는 하루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는 습관처럼 백석 시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반복하여 들여다보곤 합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하고 무엇을 포기해야 좋을는지 다만 얼렁뚱땅 우선순위를 정할 뿐이어요. 수천 개의 가능성을 떠올리자 별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다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하나씩 남아 있는 게 있다고나 할까요.


아무쪼록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무한한 욕망 탓에 한계도 조급함도 어느 때보다 깊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습관적으로 세상에 염증을 느끼는 저는 자꾸만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어딘가로 가고 싶어 안달입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생각이 갇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요.


혼자 맥주를 들이켜다 홀린 듯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습니다. 연말에는 저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도시에서 하루는 산책하고 다른 하루는 오직 침대에 엎드려 눈을 감으며 얼마의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노력을 들여도 참 쉽게도 방향을 잃곤 했던 모든 순간을 이번에야말로 진정 떠나보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지나간 흔적은 계속해서 나아갈 동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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