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이제야 알아간다.
학생들과 수업을 하던 중, 아이가 필사한 시에 눈이 갔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는 '사랑이 온다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로 시작한다.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회초년생, 사랑했던 사람과 마음을 터놓는 순간 그의 어두웠던 과거가 나에게 스며들었던 경험이 있다. 부모님의 이혼, 경제적으로 힘들어진 가정. 그의 과거와 현재를 감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미래를 함께 짊어지려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나에게서 도망쳤고, 나는 그 이후로 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인연이 두려웠다. 그를 알게 되면서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힘들었고,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인데 +1을 내가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되기 일쑤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갈 때도 매한가지여서 나는 늘 한 발자국 뒤에 있었다.
이십대의 나는 마음에 사랑이 넘쳐서 표현하지 못해 안달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게 두려워졌다. 감정을 드러내면 내일 당장 결혼이라도 하자고 달려들 것만 같았고,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되면 경력이 단절된 유부녀가 될 것만 같은 불안이 나를 옭아맸다. 그 사람을 알아가기도 전에 그가 가진 배경이 무거울까봐 두려웠고 그렇게 사랑보다 직장에서의 삶이 우선시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감각도 점점 무뎌졌다.
서른이 넘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어려웠다. 처음 만난 사람을 한순간에 사랑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마음에 들어서 연락을 하면 상대방이 거절하는 일도 잦았다. 소개팅을 하는 동안 어떻게든 그의 배경에 대해 알아내고 싶었고, 경제 관념은 있는 사람인지 가부장적인 가정은 아닌지 캐내고 싶어 요리조리 질문을 건넸다. 통하지도 않는 대화를 세시간씩 하고 일어나 집에 들어가면 쓰러지듯 잠에 들었고, 그런 일이 있었던 주말에는 소개팅을 왜 하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아이를 갖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꿈꾸는 미래는 가정 주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말마다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이 즐거웠고, 평일에는 일을 하느라 바빴다. 그런데도 들어오는 소개팅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고 싶었다.
마지막 연애 이후 5년 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나는 서른여섯이 되었고 상대방은 마흔 하나라고 했다. 키는 나보다 조금 컸고, 얼굴이 밝았다. 어두움 없이 밝은 얼굴이 마음에 들었고 특별히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이 없어서 계속 그와 만났다. 싫은 구석이 없어서 만나는 이 마음이 사랑인지 의심하면서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밥을 먹을 때, 나를 보며 웃을 때, 내가 아플까봐 걱정할 때 그 사람이 좋았다. 그렇게 만나다 보니 잘생겨 보이기 시작했고 그가 아프면 약을 사다 주고 싶었고, 맛있는 걸 보면 가족보다 그가 먼저 떠올랐으니 이 정도면 사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우습게 보일까봐 약을 사다 주고 싶은 마음을 눌렀고, 가족보다 그를 먼저 생각하고 있음을 들킬까봐 노심초사했다.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그와 결혼 이야기라도 하다가는 지금까지 지켜온 내 삶이 무너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날을 세웠다.
"나는 결혼을 하더라도 지금의 일을 계속할 거야."
"아이를 갖더라도 내 커리어를 희생하고 싶지 않아."
"육아는 남녀가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의 생각을, 두려움을 단호하게 표현했다. 이런 내가 싫으면 네가 떠나가라는 마음으로 매섭게 그를 채찍질했다. 곧 나가떨어지면 어쩌나 무서워하면서도 나는 나의 일이, 지금까지 유지했던 나의 삶이 중요했기에 거침없었다. 그런데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육아는 같이 할 수 있다고 믿음을 주었고, 일을 하는 내 모습을 멋있다고 해주었다. 잦은 출장으로 바빠서 연락을 못할 때에도 그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따뜻하고, 손을 잡고 걸으면 행복하다. 그런 사사로운 행복이 나의 두려움을 조금씩 보듬어준다. 물론 나도 안다. 그의 마음과 현실이 다를 수 있음을. 그는 육아휴직을 2년 쓸 마음의 준비가 되었어도 그가 다니는 회사는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을 게다. 일 욕심이 있는 나 때문에 때로는 저녁을 혼자 먹어야 하는 외로움이 그는 싫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를 존중해주는 태도에 나는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어느 날, 날선 말을 내뱉고 돌아오는 길에 그와 통화를 하며 생각했다. 느즈막히 아이를 낳고, 함께 육아에 지쳐 있을 우리를 상상했다. 그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따뜻한 우리의 집이 나의 울타리가 되어줄 것 같았다.
그는 화려한 스펙도, 큰 재산도 없었다. 나는 30대 후반이 되면 나이는 많겠지만 자기 집 정도는 갖춘 사람과 만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고, 그것이 곧 행복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는 성실하게 저축을 했지만 재테크에는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며 당장 우리 집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부터 고민스럽다. 그런데도 나는 제법 행복하다.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소박함 속에 행복을 아는 그에게 따뜻함을 배우면서 사랑을 느낀다. 손을 잡고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이제 나는 내가 가진 것을 그와 나누어보려 한다. 일을 좋아하는 내가 조금 더 열심히 벌어서 함께 걸어가고 싶어졌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에게 힘을 얻어서 삶을 함께 일구어 나가고 싶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이유는 내 삶을 좀 더 굳건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재력이 그걸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와 함께 '사랑'이 무엇인지 지금부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찾아가보려 한다. 나에게 힘을 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연습부터 시작해야겠다. 30대 후반의 사랑은 열정보다 용기가 필요했고, 사랑의 시작은 내 마음의 고삐를 조금 느슨하게 푸는 일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필사했던,
수많은 시들. 알았던 시들도 다시 읽게 되고
아이들은 왜 이 시를 좋아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다가
아이들이 써둔 정현종 시인의 시도 다시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