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만에 끝난 5년 연애

헤어지고 잃어버린 것

by Enero

효원과는 스물일곱 살 여름밤, 종로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한창 90-00년대 음악에 맞춰 춤추는 데 심취해서 ‘밤과 음악 사이’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옛날 음악을 틀어주는 감성 주점에 곧잘 다녔었다. 그날도 은미를 끌고 종로에 있는 그런 주점에 갔다. 특별히 다른 남자나 인연을 만나려던 목적이 아니라, 쿨의 <슬퍼지려 하기 전에> 라던지, 김현정의 <멍>을 들으며 우리가 기억하는 춤을 마구 춰 대는 게 너무 신나서 간 것이다.


구석에서 한 직장인 무리가 우리가 춤추는 모습을 한참 보는가 싶더니, 다 놀고 나가려던 차에 한 남자가 뛰어와 나를 붙잡았다.


“저 정말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마음에 무척 들어서 아까부터 말 걸고 싶었어요. 나중에 낮에 커피 한잔할 수 있을까요?” 하더니 명함을 쥐여주고 후다닥 도망쳤다.

정장 입은 모습에 당연히 나보다는 연상인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오빠’라고 불렀는데, 알고 보니 그도 나와 같은 스물일곱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적극적으로 연락하는 효원과 달리 나는 그냥 대충 ‘네네’만 했다. “네네 말고 다른 말은 못 해요?” 하면 그제야 “아니, 아니.”라고 했다. 그야말로 ‘대답 로봇’이 따로 없었다.

시간이 점차 흐르고 효원에 대해 더 알아가고, 그가 얼마나 나를 아끼는지, 또 나를 위해 얼마나 배려하고 맞춰주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서서히 그가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비슷한 듯 달랐다.


둘 다 술을 좋아해서 잔만 두 개 가져다 놓으면 어디든 근사한 펍이고 고즈넉한 주막이 되었다. 회와 소주를 마시면 양양 앞바다에 있는 기분이었고, 마라탕에 맥주를 마시면 중국 어딘가에 다다른 것 같았다.

다른 점은 나는 혼자, 혹은 언니랑 아니면 은미 정도 만나서 술을 마셨는데, 효원은 사교성도 좋고 발이 넓어서 술자리가 잦았다. 그런 날이면 꼭 늦잠을 잤고 기운이 없는 모습을 보는 게 싫어서 때때로 효원이 술을 마신다고 하면 짜증부터 났다.


사실 나도 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만취한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효원은 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클럽에 간다고 해도 재미있게 놀고 오라고 했다.

언젠가는 효원에게 “혹시 내가 밖에서 술 마시다가 다른 사람이랑 눈 맞을까 봐 걱정한 적 없어?” 물었다. 효원은 “글쎄, 엄청 나쁜 짓까진 아니어도 솔직히 2:2 술자리 이런 건 해봤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본 적은 있어. 근데 그냥 믿으니까, 굳이 생각 안 해.” 적당한 그의 대답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보기보다 계획적인 사람이었고, 그는 당장 일어난 감성에 즉흥적으로 움직일 때가 많았다.

내가 짜 온 계획에 한 번도 불평이나 불만을 늘어놓지는 않았지만, 그는 사귀는 내내 데이트 계획을 짜 온 적이 없다. 낭만이나 분위기를 잡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내가 가고 싶다고 말한 소위 ‘핫플’이나 예쁜 카페를 곧잘 흘려들었다. 내가 예약하거나 가자고 대놓고 말하기 전까지는 먼저 무얼 하자고 말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마지막을 고하는 날짜도 장소도 결국 내가 정했다. 자기 딴에는 그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배려한다는 착각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건 그가 고친다고 고칠 수 없는 타고난 성격이다. 처음 그와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했던 점.

그는 유순하고 착하며 배려심이 깊다. 그런데 이제 그게 단점으로 보였다.

그가 ‘친구’라고 말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다 머저리 같았다. 효원에게 아무렇지 않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고, 심지어 결혼식이 끝난 후 뒤풀이 자리 계산까지 하객인 효원에게 시켰다. 그렇다고 효원이 돈을 잘 벌거나 집이 잘사는 것도 아닌데, 그는 또 ‘친구 축하하는 자리니 그럴 수 있지.’하고 껄껄 웃으며 계산대 앞에 섰다.

“그 자식들은 너를 친구로 보는 게 아니야. 그냥 너를 호구로 보는 거야.”

몇 번 술에 취해 대놓고 효원에게 이런 말을 뱉은 적이 있었다.


내가 효원이 엄마도 아니고 부인도 아닌데, 그런 그의 바보 같은 행동을 보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다. “내 주변 사람이 다 잘 살았으면 좋겠어.”


나한테나 잘하지. 아니, 사실 나한테도 잘하고 있긴 해.

아니다. 너나 잘살아라. 네 앞가림부터 좀 해.


어쩌면 그의 호구 생활을 마감하는 데 가장 빠른 방법은 나와 헤어지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좋아했던 점들이 싫어졌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애인과 식사를 할 때, 그가 밥을 먹는 게 ‘처먹는 것’으로 보인다면 사랑이 식은 거라고.


먹성 좋게 잘 먹는 게 귀여워 보였었는데, 마라탕과 소주 밭을 뒹굴 듯 처먹더니 배가 나오고 살이 쪄서, 5년 전 그때로 돌아가서 지금의 효원이 나에게 명함을 준다면 그 자리에서 찢어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효원이 둘 다 애교가 많아서 남들이 경악할 정도로 둘이 쿵짝이 잘 맞았었다. 그런데 같이 밤을 보내는 순간에도 강아지처럼 애교로 찡찡거리니 남자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짠 데이트 계획이 있었다. 같이 등산을 하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나는 효원이 좋아할 만한 카페, 하산 후에 먹을 식당을 검색하고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 11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금요일 밤이 되자 효원은 또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


분명 오늘 술을 퍼마시면 내일 컨디션이 좋지 않겠지 싶어 넌지시 물었더니 덥석 잡는다.

“수아야, 우리 등산 일요일로 미루면 안 될까?”

예상 질문과 답지를 꿰고 있었던 나는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토요일에 효원은 늘 그랬듯 숙취를 호소하며 잠자고 일어나더니 온종일 게임에 심취해 있었다.


그렇게 미룬 일요일 아침 11시, 효원이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걸자 그제야 막 일어난 목소리로 화들짝 놀라서는 바로 준비하고 나온다 했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는 이미 정오가 넘었다.

등산 갈 때 정장을 입으란 건 아니지만 역시나 오늘도 똑같은 후드티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고민도 없이 꺼내 입었을 옷.

서로에게 잘 보일 생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 우린 언젠가부터 대충 아무거나 입고 대충 만났다.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원피스를 사고 화장을 해도 효원은 똑같은 티셔츠에 면바지를 대충 입고 나올 것이다.

그런 그의 옆에서 한껏 꾸민 내가 서 있을 생각을 하면 나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서 언젠가부터는 나도 화장을 하지 않고 안경을 쓴 채 나섰다. 그러니 데이트라 해 봐야 만화방에 가서 누워있기나 했지.


여러 생각이 들어 “우웅, 자기야 정말 미안해!”하는 효원의 애교도 뒤로 한 채 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한참을 걷다 뒤를 돌아보면 전날 또 술을 마신 건지, 아니면 지금까지 마신 술에 대한 벌인지 체력이 나보다 달려 뒤처져 있는 효원이 보인다. 그럼 또 잠시 쉬며 그가 내 발걸음에 맞춰 오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하다 갈림길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가면 계속 등산을 하는 것이고, 왼쪽으로 가면 하산하는 길이다.


나는 오른쪽을, 효원은 왼쪽을 택했다.

그렇게 우리는 5년 만에 갈라졌다.





“효원아, 아무래도 우리 여수 여행은 취소하는 게 좋겠지?”


언젠가 효원이 여수에 가 보고 싶다고 해서 비행기와 숙소 예약을 다 마친 상황이었다. 물론 다 내가 혼자 벌인 짓이다.

효원이 담배를 태워야 하니 숙소에서 흡연이 가능해야 했고, 우리는 뚜벅이 커플이니 교통도 편리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조용한 곳을 좋아하니 나름 한적한 곳이어야 했고, 밤마다 라면 끓여 먹는 걸 좋아하니 주방이 있어야 했다.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고민하며 준비했는데, 효원에겐 이게 너무 당연해졌다.


내가 어디까지 고민하고 예약한 건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이런 걸 준비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그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물론 고마워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여수 여행을 취소하기로 하고 우리는 한동안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보름쯤 지났을 무렵, 결국 내가 먼저 연락했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할까?”

효원이 거절했다. 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한단 말인가? 분명 또 친구들 만나 마라탕에 소주 먹느라 바쁘겠지.


그렇게 한 달 후, 아무리 그래도 5년 연애가 이렇게 얼굴 한 번 못 보고 잠수 이별로 끝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다시 연락했다. 그렇게 그다음 날, 우리는 신림역 근처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꼭 헤어져야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까, 그리고 이게 혹시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또 효원도 그사이 힘들어서 살이 쪽 빠졌다든지,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운동을 했다든지, 아니면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와서 ‘다시 잘해보자.’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고이 모셔 두었던 예쁜 핑크빛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출근하니 사람들이 오늘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


“오늘 남자 친구랑 헤어질지도 모르겠어요.”

사무실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사람들이 나보고 힘내라고, 꼭 이겨서 돌아오라 했다.


퇴근 후 카페에 먼저 도착해서 이미 커피 한 잔을 혼자 다 비운 효원을 만났다. 효원은 근사하게 차려입은 나를 보니 내가 헤어지자고 하려고 왔구나 싶었나 보다.

“우리 헤어지는 게 맞겠지?”하고 묻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이제 일어날까?”


내 5년의 연애는 이렇게 채 5분도 안 돼 끝났다.



가장 친한 친구인 은미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바로 내게 전화해서 괜찮냐고 물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진짜로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은미야, 근데 나. 우리 같이 보던 넷플릭스 드라마 이제 못 보게 됐다. 나 효원이 계정 쓰고 있었거든.”


5년 연애를 끝낸 사람이 잃어서 서운하다고 말하는 게 고작 넷플릭스 계정이다. 은미는 그럼 됐다 하고 깔깔 웃었다. 그러더니 본인도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넷플릭스 계정을 새로 등록해야 한다며 이 김에 둘이 같이 쓰자고 했다.


곰곰이 내가 정말, 이 연애가 끝남으로써 잃은 게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나는 최효원을 잃었다.

남자 친구 혹은 사랑하는 연인으로서의 최효원을 떠나서 나와 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을 공유하며 미래를 그리고 있던 그런 사람을 잃었다. 말 그대로 증발했다.


지난 5년에서 그를 통째로 비우고 나니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5년 내내 매일 행복하고 즐겁고, 매일 더 많이 사랑했는데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되었을까?

고쳐 말해야겠다. ‘매일 더 많이 사랑했다’기 보다는 ‘내일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라고 다짐하며 보냈는데.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가 행복하든지 말든지, 앞으로 잘 살든지 말든지.


그래도 웬만하면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너는 멍청하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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