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홀릭이었던 삶을 놓지 못하는 나
고등학생 때도 틈나는 시간에 아르바이트하며 지냈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그리고 일을 할 때 잘 해내고 싶고 잘한다고 인정받는 순간도 많았었다.
하지만 결혼을 한 이후부터, 시골 마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했었다.
이 일도 저 일도 여러 가지 시도해 보긴 하였지만 역시나 중도에 앞길이 뭔가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임신을 하고 나니 지옥 같은 입덧에 도대체 임산부들은 어찌 육아휴직도 못하고 출산의 문턱이 코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도 들었었다.
이건 내가 첫째를 낳고 둘째를 낳고 셋째를 임신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입덧이 없고 컨디션이 생각보다 좋은 임산부도 있다는 사실을.
일을 하며 버틸 수 있는 몸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첫째 출산을 하고 나서 얼마쯤 되었을까.
새벽에 불덩이처럼 열이 오른 적이 있었다.
시골마을에서 병원 하나 제대로 된 곳이 없어서 다른 도시로 병원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신랑이 그날은 함께 잠을 자고 있던 밤 중이라 응급실이라도 갈 수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과연 이 작디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내가 장롱면허를 탈출해야만 한다는 걸 감지했던 때가 그때였음을.
그러다가 몇 달이 흘러 신랑이 느닷없이 육아휴직을 1년 신청을 했고, 나에겐 사회로 다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미친 듯이 거부하던 운전대를 잡기 시작했다.
면허를 취득하고 단 한 번도 운전하지 않았던 내가 7년 만에 처음 운전대를 잡고 혼자 아이를 태우고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리기 시작하면서 경력단절이라는 그 틀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용기라는 게 생겼었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 주부로 애기엄마가 아닌 나의 이름을 걸고 다시 사회로 나와서 일을 할 수 있겠다는 힘이 생겨났다.
그래서 신랑에게 말했다.
“나 이제 운전도 할 수 있게 됐으니 일해 볼래.”
내가 선택한 일은 다름 아닌 “보험설계사”.
전국을 열심히 다니면서 내 이름으로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밤잠조차 줄여가며 치열하게 뛰고 또 뛰었다.
단기간에 열심히 해내서 고객도 어느덧 꽤나 많이 만들었다.
일을 놓지 못하고 늘 가슴속에 가지고 살던 나에게 너무 오랜만에 불이 지펴진 것 같았다.
항상 꿈꾼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늘 무언가 해내고 싶은 그 마음.
꼭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싶은 그 마음.
막연하지만 묵묵히 하다 보면 언젠간 닿을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보다 뭐라도 해야 성공과 실패가 오듯이 나는 가만히 있기보다는 뭐라도 해서 성공이나 실패를 하고 싶어서 워킹맘이 되기로 선택을 했다.
지금도 다양하게 활동하며 프로N잡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나를 위한 수식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