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도망치고 싶었나봐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맞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었고, 대한민국의 무능에 지쳤있었다.
대학교 3학년이던 2008년, 광우병 사건이 터졌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허용하는 FTA 체결 후, PD 수첩은 광우병을 우려하는 방송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포함한 이명박 정부의 우경화 정책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가 이어졌다. 이 때 정부는 컨테이너 박스로 바리케이트를 치며 ‘명박산성’을 쌓았고,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등 우리의 발언권과 정치 행동이 침해받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 때부터, 긴 절망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 나는 이 날, 그 숱한 여론 조사에도 불구하고 박 전 대통령이 이길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라고 생각했다), 개표 방송을 보며 승리를 축하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단골 카페를 향했다. 저녁 여섯시, 출구조사가 발표되면서부터 속이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카페에 도착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데 이 불안은 더 심해졌다.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중국집에서 자장면이며 탕수육을 시켰는데, 한 젓가락을 먹고 그것을 게워내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개표 방송을 보다가 결국, 응급실에 실려가 스트레스성 급성 위염으로 링거를 맞았다.
그 이후에, 나는 더 민감해졌다. 후쿠시마의 원전이 폭발했지만, 정치인들은 생선을 먹으며 ‘안전하다’고 말하는 코미디를 보여줬다. 고리원전의 크고 작은 사고들이 이어졌고, 그 책임자들의 무능과 부패를 보면서 나는 견딜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내 불안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더 예민하고 과장되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다른 사람들이 해외로 떠나는 이유는 제각각이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이 불안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되돌아보면 이것은 엄마에게서 이어진 불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대학생이던 1979년에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에 반대해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항쟁’을 조직하고 시위를 하다 경찰에 붙잡혀서 고문을 당했다. 한 달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경찰은 엄마의 옷을 벗겨 천장에 매달아놓고는 생리피를 철철 흘리는 여대생에게 구타와 폭언과 모욕을 일삼았다. 엄마는 너무 무서워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나서, 엄마는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가 그 때 죽지 않았거나 시위가 더 확산되었다면, 부산과 마산이 1980년의 광주처럼 폐쇄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대신 새로운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엄마는 79년부터 87년까지 불안과 공포를 느끼면서, 쥐죽은 듯이 살았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이명박 정권에 분개하던 2008년에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려줬다. 엄마가 마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으고 대자보를 쓰고 시위를 조직하던 그 때 엄마의 나이가 된 나에게. 어느 날, 엄마와 둘이 나란히 누워서 잘 때, 나는 이 세상이 너무 이상하다고, 이런 일들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가슴 깊이 숨겨뒀던 엄마의 이야기를 먹먹한 목소리로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봐왔던 엄마의 모습 - 엄마의 진보적인 성향과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 토론이나 방송에 가끔 출연하거나 인터뷰를 하기도 한다는 것, 그런데도 불안이 엄마를 휩쓸고 갈 때 엄마가 매우 힘들어한다는 것 -에서 내가 이미 이걸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엄마의 말에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2012년으로 돌아와서, 엄마가 맨 몸으로 대항했던 권력이 신화가 되어 다시 돌아오고, 그 딸이 그 상징이 된다는 것이, 내게 어쩌면 가슴 깊숙히 감춰뒀던 공포를 이끌어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엄마처럼 무겁게 투사가 되어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냥 가볍게, 내 나이에 맞게, 나만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프랑스에 가기 한 달 전, 사고는 불안을 느끼던 원전에서 터진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터졌다. 그 배가 침몰하는 모습은, 대한민국이 침몰하는 것 같았다. 그 때의 나는, 꼭 내 목숨만을 부지하려는 선장 같이 느껴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단원고 교감선생님 같았던 것 같다. 얼떨결에 탈출했는데, 그 미안함과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했던. 세월호 사고가 있고나서 나 역시, 지독한 죄책감에 빠졌다. 왜, 그 피해자들이 아이들이어야 했는지가 제일 마음을 괴롭혔다. 이 세계는 너무 견고하다고, 나는 힘이 없다고, 투정만 부렸었는데 피해는 나보다 더 어리고 약한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그럴 때,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나 은종복의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같은 책들은 산란한 마음을 붙잡아주었다. 이 책들은 절망 속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희망과 강한 의지를 보여줬고, 막막하고 불편한 마음을 모아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길을 제시해주었다.
한국에서 도망치고 싶었냐는 물음에 나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한없이 가볍게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훌훌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태도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나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고 싶다.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을 풀고, 인생이 여유롭고 유머러스한 것처럼 사는 걸 꿈꾼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역사의 맥락이, 엄마로부터 연결되어 있는 운명이 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마주하게 된다.
잔뜩 심각하게 이 세상의 짐을 다 지고 가는 것 같은 태도를 할 필요는 없지만, 모두가 그런 것처럼 나도 내 돌덩이를 매일같이 이고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