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자.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하라
‘듣기에 좋아.’라고 가볍게 말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이.
싱어게인을 보며 처음엔 매력적인 가수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또 그들의 노래가 훌륭해서 좋았다.
듣기 좋고, 보기 좋은 무대를 안방에서 즐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완성형 아티스트의 음악을 TV로 즐기는 황홀함. 그런데 거기에 뭔가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29호, 10호로 불리는 무명 가수들의 노래에 울림이 실려 들려왔다.
"살아있는 자, 자기 목소리로 노래하라!"라고 포효하고 있는 듯했다.
무명 가수의 간절한 노래가 나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나요? 삶이 노래가 되고 있나요?”
“아니요. 내 목소리를 잃어버렸어요. 삶은 청구서 같아졌어요.”
즉문즉답처럼 질문과 답을 하고 나니 그렇게 답한 이유도 바로 떠올랐다.
‘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한데 난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사자처럼 용기가 없었다.
무엇이 무서워서 포기했을까?
꿈을 잃게 한 건 두려움이란 건 쉽게 알겠는데 그 두려움의 정체는 복잡했다.
왜냐하면 두려움을 유발한 건 주위 사람들의 충고였는데, 친절하게 ‘미래를 미리 보기’ 해 주는 ‘충고’가 대부분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다양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처럼 충고에도 거리 두기가 필요해
‘이런 말은 멈춰 주세요.’ 할 만한 말들을 많이 들어왔을 것 같다.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로 시작해서 음악인으로 성장해 가는 세월이 무명으로 진행되며 '그들만의 리그'를 펼쳐오는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면, 여러 이유 중 ‘충고’를 통해 ‘부정적인 미래 미리 보기’라는 상처가 유독 독했을 것이다.
아무나 스타가 되는 게 아니잖아?
번듯한 직장 다니면서 취미로 하면 안 돼?
평범하게 살면 안 돼?
이쯤 하면 할 만큼 한 거 아니야? 계속할 거니?
아는 분, 지인, 가족 등 관계가 허용된 사람들의 이런저런 '충고' - 널 위해 하는 말 -의 융단폭격이 짐작된다. 아마, 나도 내 친구나 동생, 애인이라면 충고란 고급 포장지로 감싼 언어 폭격을 화학실험 수준으로 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충고 좀 할 줄 아는 사람’의 말이 옳았을까?
‘자기 인생도 못 보면서 남 인생을 보는 건’ 반칙이다. 그래서 충고란 ‘쓸데’와 ‘안 쓸데’를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쉽게 이런 폭격을 가하곤 한다. 대부분의 충고는 쓸데없이 상처만 남기는데도 말이다. 우린 서로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셈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처럼 충고에도 거리 두기가 필요한 이유이다.
충고를 견딘 게 아니라 충고를 넘어선 그들
연극 연출가를 꿈꾸며 대학로에서 막내로 공연장을 숨 가쁘게 뛰어다닐 때, 많이 듣던 말들이 그들에게서 연상된 건 지극히 주관적인 짐작이지만, 솔직히 누구나 이런 똑똑할 뿐 쓸데없는 충고를 수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나처럼 충고에 세뇌돼서 겁에 질린 채 결국 삶의 좌표를 바꾸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혹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 분명, 그런 부분 하나씩은 있을 것 같다. 아직도 타인, 아니 사회의 의견에 겁먹어서 놓친 게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빨리 찾아보길 바란다. 그것이 당신에게 아주 소중한 부분일 수도 있으니까.
꿈을 포기해서 내 삶이 더 좋아졌을까? 그건 아직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삶이 청구서처럼 해결해야 할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꿈을 잃고 더 좋아진 것은 아니란 쪽으로 점수가 기운다. 그래서 충고를 듣고 생겨난 두려움에 이런저런 핑계를 갖다 붙이며 꿈을 포기했던 내게 ‘난 이런 사람, 이런 가수야.'를 지켜 온 그들의 삶이 깊은 울림을 준 것이다.
충고에 겁먹거나 충고를 견뎌 온 것이 아닌, 충고 따위 넘어 선 그들은 용기 있다.
해풍을 모질게 견디면 일어나는 마법.
삶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온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는 그들만의 색깔이 보인다.
“나는 정통 헤비메탈 가수입니다.”라고 자신을 정의 내릴 수 있는 당당함.
하지만 당당함의 이면엔 무명의 세월이 준 상처들로 생긴 ‘내 노래를 좋아해 줄 줄 몰랐어요.’라는 낮은 목소리도 있었다.
"무명의 내 목소리가 과연?"
이라는 두려움을 고백하며 '시작할 땐 자신이 없었다'라고 인터뷰하는 가수를 보면서 긴 무명 생활의 고단함을 가늠할 수 있었다.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부리는 가수의 슬픈 고백이었다. 천연색 꿈이 현실에선 흑백사진으로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려와 외면의 시선을 넘어 자기 목소리로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흘깃 보게 되는 머리 모양과 옷차림이 어때서?
나와 내가 하는 음악을 표현하는 아이템인걸, 정장도 몸뻬도 다 자기 일에 맞춘 작업복이잖아?
남들이 정한 ‘누구나 좋아할 만한’이란 형용사의 틀에 갇히지 않은 그들.
그들이 주는 무명의 열정이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TV를 뚫고 통쾌함을 주었다.
코로나 19로 답답했던 우리의 마음을 뚫어준 것이다.
무명을 견뎌낸 용기 있는 그들을 통해서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학교와 일터를 잃고 무명이 되어가는 사람들이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충분히 그럴 힘을 우리에게 준다고 생각한다.
인정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인정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가치를 버릴 순 없는 것이다. 사회에서 '그럴듯하게 살고 있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한 애쓰기를 멈추고 싶어 졌다.
인정도 박수도 못 받더라도 무명의 시간을 넘어서 10년 20년을 '자기 목소리'를 지켜왔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빛을 발한 것이었다.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난 유명, 무명을 따지지 않을 것이다.
꿈과 현실 속에서 꿈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야 삶이 청구서가 아닌, 삶이 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중년을 살아가는 그들의 얼굴에 주름이 ‘나이 들었다’고 보이지 않고 ‘잘 여문 것’으로 보이는 것은, 해풍을 견디고 명태가 되어가는 바로 그 묵은 생명력이 아닐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나요? 삶이 노래가 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