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그날의 기억. 그곳에 가지 말아야 했다.
2011년 5월 10일.
그곳에 가지 말아야 했다.
유난히 직장 일은 힘들었고 집에도 가기 싫었던 밤이었다. 불러낼 친구도 갈 곳도 없던 나는 평소에 봐 두었던 간판이 예쁜 술집으로 갔다. 그날은 일탈을 해보고 싶었다.
몇 잔째였을까. 갑자기 한 남자가 옆자리에 슬며시 걸쳐 앉았다.
“혼자 술 마시는 모습이 섹시한데요?”
눈웃음으로 무장한 남자는 빈 잔에 술을 가득 부으며 건배를 해왔다. 웃는 모습이 착해 보여서 그가 채운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몇 잔을 더 마셨을까. 몇 번을 더 건배했을까. 어느새 취해버려서 기억은 술집에서 끊겨버렸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땐, 알 수 없는 모텔에 한 남자와 누워있었다.
‘그 남자랑 여길 온 거야? 미친 거 아니야?’
너무 놀라서 이불 밖으로 뛰쳐나와 옷을 입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그 남자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냥 가면 아쉽지, 해장국은 먹고 가야지.”
그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텔을 빠져나왔다.
외박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이 얼마나 걱정했을까. 아니 화가 났겠지?’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 이건 변명거리도 없는 짓이야. 머릿속이 벌름거렸다.
사랑이 식었다고 해서 외도를 하다니, 나답지가 않았다. 혼자 술집에 앉았을 때 이런 일을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일어나게 될 줄은 몰랐다.
자책하느라 남편과의 갈등은 잊혔고, 오히려 전보다 평온한 일상이 됐다.
일상이 잔잔해서 그 일은 몹쓸 우발 사건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그 남자가 찾아오기 전까진.
하룻밤 해프닝은 일주일이 지나고부터 내 삶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죠?”
“그날 명함을 줬는데? 서로 마음에 들었던 거 아닌가? 왜 빼고 그래?”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 실수였어요.”
하지만 그 남자는 연락을 멈추지 않았고 전화를 수신 거부해버리자 직장 앞에서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실수여서 다시는 꺼내기도 싫었는데 그가 찾아오면 찾아올수록 내 마음에 틈이 생겼고, 어느새 실수를 인연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러다 자주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싶어 혼자 술집에 앉았던 건 아닌데, 나의 일탈은 자유가 아닌 불미스러운 일이 되어갔다.
두 달의 시간은 악몽 그 자체였다. 연락이 안 되다가도 불쑥 나타나서 온갖 달콤함을 풀어놓다가 다시 전화를 받지 않은 채 며칠씩 기다리게 하는 일이 반복됐다.
악몽도 꿈이라 여겼는지 어떻게든 제대로 된 연애를 해내야겠다는 오기 때문이었는지 난 고통스러운 탱고를 멈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여자가 전화하다니.
실수가 아닌 로맨스라고 우기고 싶어서 시작한 연애가 로맨스는커녕 추잡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니, 너무나 모멸스러웠다.
외로워서 찾는 사랑은 결국 더 큰 외로움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검은 봉지를 뒤집어쓰면 검게 변한 세상이 숨 막히게 조여 올 뿐이었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떨리는 나와는 달리 태연했다.
“어떤 여자가 전화했어.”
여자란 말에 눈치를 챘는지 말이 없었다.
“이상한 여자한테 전화가 왔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의 침묵에 나는 점점 감정이 무너져 내려갔다. 침묵은 범행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변명마저도 포기한 그의 무례함에 홍수로 둑이 무너지듯이 이성을 잃어갔다.
“그 여자 말이 사실이야 아니야?”
칼로 찌르는 것보다. 찌른 후 아무 변명도 하지 않는 게 더 잔인한 짓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대로 말해줘.”
내 악다구니에 질렸는지 해명 같은 말을 뱉었다.
“헤어지는 중이야, 좀 기다려.”
“이젠 널 믿을 수 없어.”
“뭘 못 믿어. 헤어지는 중이라고 했잖아. 어쩌라고. 나 보고 어쩌라고.”
갑자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피해자는 난데 사과도 변명도 하지 않고 제 감정만 내세우는 건 반칙 중 가장 나쁜 반칙이다.
“어떻게 사귀겠다고 결심했는지 알면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
온갖 불행의 주문에 시달리며 질문을 했다. 사실을 알아야 했으니까.
전화로 신고 접수된 내용은 사실이 아닌 날조라는 변명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를 사귀게 된 건 벼랑 끝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마저 부정당할 수는 없었다.
아무 말도 안 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좀 내버려 둬라. 시달릴 만큼 시달렸다. 다 귀찮다.”
“뭐? 내버려 둬? 시달려? 귀찮아? 나쁜 놈!”
그 말을 듣자 일순간에 밀물이 빠져나가 버리듯 내 존재의 가치가 사라져 버렸다.
이런 놈에게 내 진실을 담다니. 내 불행이 치유되길 바랐다니.
불행은 피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어. 불미스러운 틈새로 불행은 더 거대한 불행을 데리고 오는 거였어.
난 극도의 분노와 절망감에 뒤엉켜서 밖으로 뛰쳐나갔고 울면서 차를 몰았다.
웃는 모습이 착해 보였던 그의 두 눈을 찌르러 가야 했다.
그러나 시내를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사고가 났고, 찔린 건 내 삶이 되었다. 사고 후 이혼을 하고 딸의 곁을 떠나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