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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키모자이크 Oct 18. 2020

<연재소설> 영원의 정원 / 제1장 이상한 연극

"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만큼은 항상 속수무책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고 하더라도 영혼만큼은 가져갈 수 없어요."*  


  마스크를 착용한 관객들이 모두 숨을 죽인다. 크고 작은 호흡들을 마스크 안에 조용히 가둬둔다. 어떤 이는 이미 눈물로 마스크를 몰래 적시고 있다. 전염병이 바꿔놓은 2020년 어느 극장 안의 풍경이다.


 줄무늬 잠옷을 입은 여자주인공이 그녀의 방에 있다. 그녀는 조금 비틀거리다가 침대에 모로 눕는다. 남자주인공이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는 이 연극의 5막 마지막 장면, 두 배우는 같은 무대 위에 있지만 둘 사이에는 방백(傍白)이라는 약속의 벽이 쳐져있다.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의 말을 절대 들을 수 없다.


  남자주인공이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뻗는다. 왼손으로 심장을 움켜쥔다. 이때 의상 안의 물감주머니가 터지면서 남자주인공의 가슴팍을 붉게 물들인다. 어금니를 꽉 깨물자 입 안의 캡슐이 터지면서 입 밖으로 붉은색 식용잉크가 흘러내린다. 


  "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만큼은 항상 속수무책입니다." 


  관객석은 눈물의 바다를 이룬다. 흐느끼는 어깨들이 간접조명을 받아 밤의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극장 안을 슬픔의 기운이 가득 메운다. 슬픔에도 색깔이 있다면 그건 아마 하얀색일 것이다. 피어오르는 흰색 물결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연상시킨다. 잔잔하면서 밀도 있고, 한 번 엉키면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컨트롤룸에서 조명을 비추는 엔지니어조차도 — 매일 보는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 또 슬픔에 잠긴다. 남자주인공이 펼치는 혼신의 연기는 극장 안의 모두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 — 그런 것처럼 보였다.— 이 절정의 순간에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나는 듣고 싶은 말도 없고, 더 하고 싶은 말도 없어요. 아 피곤해." 하고 여주인공이 말한 것이다. 그렇게 말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약속된 대사가 아니었다. 여주인공의 돌발행동에 스태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허둥지둥 막이 내려오면서 암전이 된다.


  남자주인공은 감정을 전달해야 할 대상에게만 감정을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면 그녀에게만 통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석에 앉아있던 나는 그 정원의 화단을 떠올린다. 그 화단에 골고루 뿌리던 물줄기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혼자만 죽어버린 그 꽃 한 송이를 기억한다.


각주 

*뮤지컬 <아이다> 중 아이다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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