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있겠죠. 내 공간, 내 집
"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유주택자가 되다니"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롭게 놀라고 있다.
올해의 끝자락에 큰 결정을 했다. 유학을 가려고 모아놓은 돈을 우선 살 집을 구하는데 쓰기로 했다. 전세 매물이 적고, 현금 가치가 떨어지는 등의 현실적인 이유들은 물론이고, 독립을 준비하며 부동산에 부쩍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부모님의 지원도 있는 상황이었다.
삶에서 어떤 선택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고 느껴지는 시점들이 있다. 지금 매매하지 않으면 또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구매 결정을 하고, 신기하고 뿌듯하고 걱정되고 온갖 감정들이 몰려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통잠으로 잘 자는 편인데, 새벽에 깨기도 했다.
"원한다면 언젠가 하게 돼요. 그리고 하지 않으면 정말 원하지 않았던 것이니 괜찮아요." 좋아하는 언니가 단단한 목소리로 해준 말이다.
집을 사기 전 마지막 순간에 가장 고민이 된 건 유학이었다. 영국으로 예술 경영을 배우러 가려고 했다. 작가의 삶과 공간의 강점을 잘 담아내는 전시와, 지역의 브랜드와 아티스트들과 콜라보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싶다. 런던에서 예술을 배우고, 향유하는 생활을 상상하는 게 행복했다.
순서대로 하나씩 해나가는 여정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삶을 상상해 보고, 내 마음을 확인하고, 결정할 수 있을 만큼 고민의 시간을 쌓이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된다.
매매 과정에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러면서 삶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면서, 어른들의 도움을 받는 법을 배우고 싶어졌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의 일이라 여겼던 부동산 매매가 내 일이 되니, 막막한 느낌이 몰려왔다. 잘 모르는 문제를 만났을 때는 그 과제에 호기심이 생길 수 있게 한다. 직접 가보고, 주변에 물어보면서 머릿속에 질문이 떠오르도록 자극을 준다.
일단 추천받은 매물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동네를 둘러보고, 내가 살았던 환경과 비교했다. 무엇이 아쉽고, 무엇이 좋은지 동네의 느낌은 어떤지, 나는 여기서 어떤 삶을 만들어가게 될지, 그리고 그 상상이 설레는지까지.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의 상황을 오픈하고 계속 물었다. 누군가는 집값이 많이 오른 상황이고, 내가 마련할 수 있는 자금으로 살 수 있는 매물은 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렸다. 반면에 집은 사면 오르니, 기회가 될 때 사두라는 의견도, 장기적으로는 오른다는 확신도, 매매하려는 지역이 괜찮다는 의견들도 다양하게 들었다.
"우리 딸이 어른이 되라고, 혼자 가보라는 거야 긴장하지 말고 잘하고 와!" 약정서를 쓰러 가기 전날에 엄마의 말을 듣는데, 일본의 '나의 첫 심부름'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아이를 보내고, 돌아올 때까지 베란다 테라스에서 발걸음을 못 떼는. 엄마아빠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나는 진작 독립했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께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아이로 보이나 보다.
매매 결정으로 시작해서,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시기별로 돈을 준비하고, 인감을 만들고, 주소지를 옮기는 등 처음 가는 길에는 길잡이가 필요했다. 요청하기도 전에 먼저 도움을 주러 달려온 부모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모든 걸 혼자 해내는 게 단단한 어른이라는 증거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사랑 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고마워할 수 있다면, 제법 괜찮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동시에 결국 결정하고 책임지는 건 나니까, 무언가에 기대지 말고 혼자 설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이 있어야 가장 나답게 선택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다음 매매부터는 내 지식과 판단으로 가장 주도적으로 행하고 싶다.
계약금을 송금한 날 저녁에, "내가 집 산 것보다 좋다"며 엄마가 나보다 더 좋아했다. 전화기 맞은편에서 고생했다며, 앞으로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줄 좋은 기반이 될 거라는 부모님의 들뜬 축하 인사가 번갈아 들려왔다. 그러니 덩달아 걱정이 줄고, 기쁨이 늘어나면서 괜히 행복해졌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조언해 줄 수 있지만, 결국 나에게 맞는 선택은 아무도 알려줄 수 없다는 걸 배워가고 있다.
대출을 받으며 “요즘도 집 사는 사람들 있나요?” 하니, 6.27 규제 전에 대부분 구매했다고 하셨다. 남들과 다른 타이밍에 매매하는 게 맞나,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매매를 결정하고 나서는 그냥 나만의 타이밍이 있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떻게 흘러가든, 미래의 내가 잘 대응할 거라고 믿어보는 수밖에.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대출했고, 아늑한 동네에서 보금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집마련이라는 과제를 마음의 짐처럼 안고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좋다.
12월에 이런 거대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한 해를 야무지게 마무리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