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day in November
날이 밝으면 후회할 줄 알았는데, 출근해 자리에 앉으면 더 후회할까 싶었는데 외려 새로운 계획과 각오만 다져졌다. 남은 시간 3개월. 91일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다. 그 사이에 미루었던 자격증 실기를 준비하자. 공방 재오픈도 괜찮을 것 같다. 접은 지 1년이 넘었음에도 상담과 예약, 출강 문의는 각종 기념일, 시즌 때마다 꾸준히 들어오고 있으니 쌩판 처음 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뭐가 됐든 할 것 없고, 갈 곳 없으리. 우선은 카드 사용부터 절제하자 다짐한다. 3개월 후 혹시 모를 최소 3개월은 대비해야 하니까. 다음부터는 무엇이든 미루지 말자고도 결심한다. 지난 10월의 실기를 미루지 않았더라면 어제부로 후련하게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복사기는 왜 고장 난 거예요?"
어제 출근하자마자 한무식이 똥 씹은 얼굴로 물었다. 사무실에 복합기가 있는데 그걸 복사기라고 한다.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그런 것쯤은 개똥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나니까. 정확히는 고장이 아닌 ADF에 붙어 있던 화이트보드가 떨어진 거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스펀지 테이프는 제거하고 양면테이프로 다시 붙여 사용해도 되는 거던데, 기물을 내 마음대로 만졌다며 노발대발할 게 분명하므로 엊그제 퇴근 무렵 사진과 함께 문자만 발송했었다. 'ㅇㅇ님 복사기가 (어쩌고 저쩌고...) 내일 자세한 설명드릴 테니 출근하시면 놀라지 마시라'라고.
"이거 왜 이래요?"
"어제 ㅇㅇㅇ씨가 스프링북을 들고 와서 이만큼(대략 50장 추측) 복사하겠ㄷ"
"그렇다고 그걸 다 해주면 어떡해요?"
"그냥 온 것도 아니고 A4지 한 묶음을 가져와서 말하는데 안 된다기도 그렇고. 전에 ㅇㅇ(너)님이 해주신 적이 있어서 안 된다고 거절하기가 그래ㅅ"
"그거는 몇 장 안 되니까 하게 했던 거고요! 용지만 가져오면 몇 권이고 다 해줄 거예요! 그럼 다음에 또 해달라고 한다니까요!"
"알겠어요. 이제는 안 된다고 할게요."
"알았어요! 알았냐고요!"
"(아잇 깜짝이야!) 그렇게까지 소리 지르고 화낼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화를 내시네요. 알겠어요, 이제 안 된다고 할게요."
"그리고 왜 자꾸 끝에 말을 붙여요? 왜 자꾸 내가 뭐 어째서 그랬다 말을 붙여요!"
"아니면 (아무 권한도 없는) 제가 그렇게 해줬을 리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제 안 된다고 할게요."
"선생님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요! 원래 그렇게 따지는 사람이었어요!"
말 꼬리를 다 잘라 재끼고 눈을 부라리며 버럭버럭윽박까지 질러대는데 더 이상 대꾸할 마음도,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한두 번도 아니고 '좋게 말하는 법을 모르는 거냐, 인격 존중을 모르는 거냐,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이냐' 묻고 싶지도 않을 정도의 말본새와 그 면상에 비위가 너무 상해버렸다.
내가 따지는 사람이냐고? 원래 그런 사람이었냐고? 내가 정녕 그런 사람이었다면 분명하게 따져줬겠지. 다음에 또 그렇게 해달라고 할 걸 알면서도 너님은 그때 왜 해준 것이냐. 몇 장이든 아니든 너님이 해 줬으니 들고 온 것 아니겠느냐. 그리고 지난달에 ㅇㅇㅇ씨가 책 3분의 1(스프링북 복사해 간 분량) 정도를 복사해 달라고 했을 때 두 세장은 몰라도 그렇게까지는 안 된다고 했다니까 그때 너님이 "그냥 해줘요. 그건 선생님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해준 건데 당신이야말로 원래 그런 사람이었구나. 기분 따라 일구이언 일삼는!
노인 조울증이 있나? 자주 생각했다. 기분이 갑자기 좋았다가 어느샌가 또 나빠져있으니까. '날씨가 좋다, 바람이 많이 분다, 저기는 무슨 공사를 하는 건가, 비가 오려나 보다, 피곤하다' 등과 같은 본인의 혼잣말에도 반응해 주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집기와 사물 등을 거칠게 다루고 사람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진다. 전혀 화낼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버럭버럭 화를 내고 쓸데없이 위압적인 태도를 남발한다. 집에 있는 처자식들을 저따위로 대하는 걸까. 기든 아니든 되게 못나 보인다. 나이에 어울리는 점잖음도 중후함도 없는 늙다리 유세로만 보여 우습기만 하다. 이제는 나이마저도 존중해 주고 싶지가 않을 정도다. 그만 참기로 했다.
"ㅇㅇ까지만 근무하겠습니다."
"기분 나빠서 그만둔다는 거예요?"
"네."
"알았어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언제 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복합기 수리에 관한 내용을 전해왔다. 수리비가 19만 원 정도 하는데 올해 예산은 끝이 났으니 일단은 테이프로 붙여 뒀단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저 표정과 능글맞은 말투. 영낙없는 다른 사람이다. 어떨땐 괜찮은 사람 같고 어떨땐 무례한 노친네 같고 또 어떨땐 감당 불가 조울증 환자 같은… 그 기복에 내 기분까지 이랬다저랬다 좌지우지되기까지… 익숙해지면 안 된다. 저 기복에 더 이상 놀아나면 안 돼. 그만두기로 한 건 천 번 만 번 잘한 일이야.
오늘부터 나는 저님을 무식(국어사전 2. 행동 따위가 격에 맞거나 세련되지 않고 우악스러움.)으로 칭하기로 한다. 나도 언젠간 늙을 텐데 좋게 좋게 생각하자며, 그게 안 되면 차라리 불쌍히라도 여기자며 때마다 참아 왔는데 인간이 정도것이어야지. 점점 지나치는 무례한 행태를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나보다 나이 많고, 많이 배웠으면 뭐 해. 연륜이고 나발이고 배울 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그저 그런 늙다리에 불과한 수준인데. 나를 이토록 화나게 하다니. 미운 말들을 이렇게까지 내뱉게 하다니. 저님은 참으로 대단한 인간이다.
잊을만하면 책상머리에서 딱 딱 딱 딱 손톱을 깎아댄다. 내방했던 손님이 무슨 소리냐고 물을 정도로 6미터 거리에 있는 정수기 앞까지 들리게끔 짭짭 쩝쩝 방정맞게 껌을 씹어댄다. 업무시간마다 대자로 뻗어 한두 시간씩 입 벌리고 코를 골며 퍼질러 자는 소리에 머리통이 울려 미치겠다. 참다못해 두통약을 먹은 적도 있다. 대회의실로 피신도 가 봤지만, 문을 닫지 못하니 공해 수준의 데시벨은 큰 차이가 없다. 흡연 후 담배 냄새를 폴폴 풍기며 바로 옆에서 주절거린다. 예의는 나이에 말아먹고 매너는 똥으로 싸버린 인간. 이뿐이랴... 그만둘 때까지는 바로 옆자리에서 더 많은 것들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전에 빠른 진로가 정해지길 바란다. 본인 입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왕따라더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인격체였다.
공부하며 글쓰기에는 괜찮은 환경이었는데.
나는 절대 곱게 늙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