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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사 버르사마

(Desa Bersama) 6.

by 타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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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로로 들었는지 야니가 큰 잘못이라도 한 표정으로 찾아왔다.

아니라 해도 그녀는 진심 미안한 얼굴로 Maaf(마압;미안)을 반복했다.


얼마 후 야니는 또 다른 지인과 방문했다.

당분간 혼자 있고 싶었지만 선의를 기분 좋게 거절할 실력이 되지 않았다.

함께 온 수기라는 여자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히잡을 쓰지 않은 그녀는 야니 보다 나이 들었고 하띠 보다는 젊어 보였다.

노련하고 거만하게까지 보였던 하띠와 달리 그녀는 연신 웃어 보이며 좋은 첫인상을 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서글서글하고 수더분해 보이는 그녀는 까탈스럽지 않게 월급 협상에 오케를 외쳤고 예상보다 빨리 나는 다시 사람을 들이고 말았다.


성격 좋아 보이던 그녀는 그러나 말이 너무 많았다.

금세 나를 파악하고 아예 묻지도 않던, 제멋대로 일하던 하띠와 달리 수기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걸 묻고 행동했다.

상냥한 얼굴로 두리둥실 웃으며.

뇨냐 이 잔은 여기 두랬지? 뇨냐 바닥 청소는 이 세제 쓰지? 뇨냐 행주만 이렇게 따로 빨아

널랬지? 뇨냐 이건 마른걸레로 닦지? 뇨냐 이건 다리지 말랬지?


나는 번역기를 써가며 최대한 대꾸했는데 어느 시점이 되자 그녀의 웃음이 말이 서툰 외국

여자가 재밌어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글거리며 자꾸만 말을 시키는 행동은 하띠 와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좋네. 괜히 교회 갈 필요도 없고.”


남편의 말도 비웃음 같았다.

나는 오기가 발동해 더 정확한 발음으로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려 애썼다.

그러면 수기는 신기하고 기특하다는 표정을 하고 더 말을 시켰다.

얼마 후 나는 외출을 시작했다.

집순이를 자처했던 나는 수기 덕에 집 밖으로 향해야 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가능한 한 요리조리 피하다 문을 열고 밖

으로 나갔다.

그녀와의 대면 시간을 어떻게든 줄여야 했다.

아파트와 이어진 몰을 공원 삼아 한량처럼 빈둥거리며 매장이란 매장은 다 둘러보고 기웃거렸다.

스타벅스에 내리 삼 일을 출근하다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직원에 놀라 다음 날엔 맥스 커피로 향했다.

반강제적인 이런 외출은 나를 점점 피곤하게 만들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훨씬 적어진 어느 날, 화장품을 바르던 나는 문득 불투명 통을 들어 무게

를 가늠했다.

[걸레질하다가도 제 로션을 짜서 바르더라구요.]

스치듯 봤던 커뮤니티 글이 떠올랐다.

무슨 시트콤에 나오는 얘기냐며 흘려버린 내용이기도 했다.

이후 화장대에 앉을 때마다 나는 서랍을 열어 소소한 물건을 체크하고 립밤이 몇 개였는지를 기억했다.

솔직히 뭐가 몇 개 있었는지 정확하지 않았지만 어쩔 땐 있던 뭔가가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근거 없이 싹 튼 의심은 음모론처럼 조용히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방에서 나오다 잠시 외출한다는 수기와 마주친 나는 유난히 반짝이는 그녀의 입술에

눈이 갔다.

수기는 서둘러 문을 나섰고 나도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있어야 할 립밤이 보이지 않는다..?

기분 탓인가 스스로 반문하는데 괜히 콩닥거렸다.

맞나? 아닌가?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슬금슬금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주기적으로 식모 방을 체크하라는 글을 본 적 있지만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머리는 여전히 질문 중이었으나 몸은 이미 그녀 방에 도착해 있었다.


남의 방을 허락도 없이.. 근데 차라리 확인하는 게..


여러 가지 것들이 동시에 떠들었다.

심장도 더 들썩였다.

한 명 누울 매트리스가 깔린 그녀의 방은 작디작았다.

플라스틱 삼단 서랍장 위에 식기들이, 벽걸이에는 옷과 가방이 걸려있었다.

이 집에서 그녀의 공간은 고작 두 평도 안 돼 보였다.

서랍을 열려는 내 손이 어색하게 내려다보였다.

뭐 하는 짓인가 하는 머쓱함과 쪽팔림이 동시에 몰려왔다.

죄짓는 듯한 오른손을 치우고 돌아서던 그때, 매트리스 아래로 들어간 발가락에 뭔가가 부딪혔다.

쪼그려 앉아 매트리스를 들춰보았다.

긴가민가했던 낯익은 립밤 하나.

자주 쓰진 않지만 한국에서 가져온, 화장대 서랍에 있던 그것이 끄트머리에 놓여있었다.

심장이 털썩했고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날 저녁 수기는 남편 앞에서 죄인마냥 머리를 숙이고 마압을 반복했다.

우리 사이에는 작은 립밤 하나가 놓여있었다.


“잘 쓰지는 않지만.. 그치. 그래도 손대는 건 아니지.”


손가락만 한 립밤에 남편은 멋쩍어했지만 더 일하지 못할 이유를 설명하고 일한 만큼의 월급

을 수기에게 건넸다.

인상 좋은 얼굴로 왔던 그녀는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마압과 함께 집을 떠났다.


그녀들이 훑고 간 자리는 아무렇지도 않지 않았다.

아직 잘 모르는 이곳 사람들이 상처를 주고 있었고 나 역시 상처를 남긴 기분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과 멀어지기부터 하는 듯했다.

다들 사람 쓰고 기사 쓰고 골프 치고 그렇게들 산다던데.

불임만 빼면 나도 보통 사람인데.

정말 내가, 문젠가..?

내가, 예민한가.

그래서 애도 안 들어서나?


부록도 이곳까지 따라왔다는 걸 난 잠시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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