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2

by 최영훈

이런 세트를 판다고?

페이스북을 들락거리다 이상한 광고를 보게 됐다. 처음 보는 수영복 브랜드에서 초보자를 위한 남성 실내 수영복 세트 광고였다. 무려 7종. 응? 수영할 때 필요한 게 그렇게 많았었나 하고 들어가서 봤더니 필수 아이템인 수영복, 수경, 수모는 물론이고 귀마개와 스포츠 타월, 코 클립과 수영 가방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가격은 3만 원 정도.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혹시나 해서 이런 세트가 많은지, 다른 색도 있는지 검색 해 봤다.


지금 검색할 수 있다면 “수영 초보자 세트”를 검색해 보라. 대부분의 수영 용품 전문 사이트와 관련 브랜드에서 다양한 조합으로 준비하여 내놓았지만 구성의 기본은 같다. 당연하게도 수영복, 수모, 수경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무채색이다. 네이비와 블랙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강습용 수영복으로 검색해도 마찬가지다. 남녀 불문이다. 수모와 수경까지 블랙과 네이비라니. 일부러 그렇게 찾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들 절묘하게 색을 맞춰 놨다.


첫 번째 수영복

내가 처음 수영을 시작했을 때, 그 첫 수영복은 아내가 주문해 줬다. 당연히 검은색, 그것도 5부였다. 약간의 무늬가 들어가 있긴 했지만 검은색은 검은색이었다. 그때 아내가 그랬다. 초보자 때는 원래 그렇게 입는 거라고. 기초반에 가니 다들 그렇게 입고 왔다. 운동복은 물론이고 가벼운 여름 티를 살 때도 오렌지색과 노란색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지겨운 색이었지만 몇 달 참았다. 그 후 파란색과 흰색, 붉은색과 검은색이 그라피티처럼 섞인 수영복으로 바꿨다. 사진의 수영복이다.

그래도 여전히 갈증이 있었다. 오렌지색 수영복을 검색했다. 당연히 없었다. 그때만 해도 흔치 않았다. 그러다 일 년쯤 됐을 때 마스터 반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숏사각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삼각과 사각의 경계에 있는 남자 수영복. 박태환 선수가 연습할 때 입는 수영복 스타일을 생각하면 된다. 또 그 반에서 해외 공구를 하는 사이트와 그걸 잘 찾아서 대신 주문해 주는 청년과 친하게 됐다. 그 청년에게 오렌지색 숏사각 수영복을 주문했다. 그 후, 딸이 태어나서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수영을 그만두기까지 여러 벌의 수영복을 샀다. 철저히 내 취향으로.


십 년 정도 수영을 쉬었다가 다시 수영을 시작할 때는 이때 사놓은 수영복 중에서 한국 브랜드의 탄탄이 수영복 두 개를 번갈아 입었다.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오렌지색, 하나는 롤리팝 무늬. 이 두개의 수영복을 한 일 년 입다 보니 지겨워졌다. 오렌지색 수영복은 올이 풀리기 시작했고. 마스터 A반으로 올라간 후 몇 달 있다가 겸사겸사 평소 맘에 두고 있던 수영복을 샀다. 나와 체형이 비슷한 남자 회원이 같은 브랜드를 입고 있어서 사이즈를 물어봤다.


같은 듯 다른, 다른 듯 같은

다른 글에도 썼듯이 십 년 만에 간 수영장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초보반은 무채색 수영복을 입고 있고 중급반은 원색과 무채색 반반, 고급반은 원색과 무채색이 대략 7:3 정도다. 원색이라기보다는 자기 취향이 드러나는 색이라고나 할까? 또 날씬한 사람은 제법 과감한 색과 디자인의 수영복을 입고 덩치가 있거나 살집이 있는 사람은 보수적인 디자인과 어두운 색의 수영복을 입는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예전에 이것이 상식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뚱뚱한 사람도 내 수영복과 같은 핑크색을 입고 오늘 처음 수영장에 오면서 수영장을 술렁이게 할 정도로 과감한 디자인과 파격적인 색상의 수영복을 입고 오는 사람도 있다.


내돈내산이라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내 생계를 꾸려가게 해주는 조직이나 회사에 갈 때는 적당히 거기의 코드에 맞춰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소위 기업과 조직은 그 나름의 문화라는 것이 있고 그 문화는 그 조직과 기업의 소프트 파워가 될 수 있기에 그 파워에 구성원인 내가 힘을 보태는 것이 그 기업과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말 같지도 않은 규칙에 전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 사시사철 크록스 따위를 신고 출근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돈 내고 가거나 다니는 곳이라면 자기 취향을 최대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 아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남에 눈치 보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 해 번 돈으로 수영장에 등록하고 수영복과 수모와 수경을 사서 수영을 하러 가는데 왜 남에 눈치를 봐야 하나? 어떤 운동, 어떤 취미를 갖고 있든 마찬가지다. 팀으로 하는 운동이어서 유니폼을 맞춰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개성을 표현하며 사는 게 좋다.


보더의 패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그 취미의 근본 철학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스케이드 보드 같은 경우다. 이들을 보면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스케이드 보드 자체도 화려하고 보드를 탈 때 신는 신발, 바지, 상의, 헬멧도 화려하다. 종종 숏폼에 꽃단장을 하고 긴 머리와 테니스 스커트를 바람에 날리며 롱 보드를 타는 아가씨들이 나오곤 하는데, 그건 엄밀히 말하면 스케이드 보드의 정신, 즉 자유로운 표현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다. 보더들의 패션은 그 정신의 일부이자 그 자체다. 그런데 남을 의식한 꽃단장이라니...


우물쭈물하지 마라

오역이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네, 말들이 많지만,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쓰여 있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유명하다. 내가 오늘 검은색 수영 초보자 세트를 구매하려는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당신이 무슨 수영복을 입었는지 모른다. 나같이 이런저런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글감을 찾아 언제나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사람이나 그런데 관심을 기울이지 대부분의 회원들은 자기 수영에만 관심이 있다.


게다가 수영복을 입고 물 밖에 있는 시간은 아주 짧다. 샤워장에서 수영장까지 가는 시간, 그 정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들 자기 운동하기 바쁘다. 앞에 사람 발바닥을 보면서 그 발바닥이 더 멀어지지 않도록 갖은 애를 쓰면서 앞으로 가기 바쁘다. 다들 자기 살기 바쁜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시선을 끌지 않는다.

더 결정적으로 당신은 시선을 받을 만큼 몸매가 좋지도, 외모가 출중하지도 않다. 그렇다. 우리 대부분은 평범하다. 설령 당신이 아주 몸매가 좋고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며 아주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더라도, 그런 당신과 스쳐간 사람도, 길모퉁이만 돌아가면 당신을 기억해 낼 수 없다. 당신이 좀 전에 은행을 털었고, 자동차로 달아나기 전 그 사람이 유일한 목격자여서 경찰이 그 사람에게 당신의 인상착의를 물어봐도 그 사람은 당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고작해야 치마 길이와 피부색, 머리 길이 정도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평범하다면, 역설적으로 좀 특이하게 하고 다녀도 괜찮다. 어차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들 열심히 운동하는 곳이라면 더 그렇다. 올봄 처제와 등산을 하면서 레깅스 입은 아가씨들을 무수히 봤지만 그 아가씨들 중 기억해 낼 수 있는 아가씨는 한 명도 없다. 그러니 호피 무늬 레깅스를 입고 가도 괜찮다. 잠자리 선글라스를 쓰고 가도 상관없다.


짧은 인생, 더 짧은 청춘

이런 얘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수영장에서 뿐만 아니라 침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파트너가 날 어떻게 볼까 걱정 돼서 자기 검열 따위는 하지 마라. 아니, 침대에서도 내 맘대로 못하면 도대체 어디 가서 그런다는 거야? 어차피 그 위에서 내 욕심껏 활개 치며 노는 시기도 얼마 안 된다. 그러니 놀 수 있을 때 놀고, 마음 내키는 대로 놀아라. 그 마음을 꺾는 파트너 하고는 헤어지는 게 낫다. 그 사람은 당신의 청춘과 인생을 갉아먹는 존재다.


우리 대부분은, 오역이 아니라 직역으로, 버나드 쇼의 묘비명 문구와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인생이다. 좀 다르게 살고 싶다면, 아니 그런 인생에 약간의 포인트를 주고 싶다면, 남에 눈치 안 봐도 되는 곳에선, 좀 그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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