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줄은 모르는 1번이 짊어진 무게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06

by 최영훈

핀 수영의 이면

6월의 첫 수영은 핀 수영이었다. 혹시나 해서 설명을 하자면 오리발을 끼고 하는 수영을 말한다. 오리발, 즉 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롱 핀과 숏 핀. 롱 핀은 스킨 스쿠버나 프리다이빙 영상에서 흔히 보는 길이가 긴 오리발이다. 브랜드마다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소재는 대체로 고무와 플라스틱이 섞여 있다.


숏 핀은 주로 실내 수영의 훈련용, 구조대의 훈련과 실전을 위해 사용되는 길이가 짧은 오리발이다. 길어봐야 한 50센티미터나 될까? 소재는 주로 부드러운 고무 재질이 쓰인다. 최근 우리 수영장 강사들이 숏핀으로 바꿔달라고 부탁을 해서 다들 바꿨는데, 그 이유는 롱 핀의 플라스틱 재질의 끝 부분이 종종 뒤에 따라오는 사람의 몸이나 얼굴에 자잘한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나도 최근 숏 핀으로 바꿨다.


롱 핀을 하다 숏 핀으로 바꾸니 힘이 두 배로 든다. 한 번의 킥만으로도 앞으로 쑥 갈 수 있었던 롱 핀과는 달리 숏 핀은 제법 킥의 횟수가 많다. 게다가 내 숏 핀은 일반 고무보다 훨씬 부드럽고 가벼운 EVA 소재로 된 물에 잘 뜨는 것이어서 더 힘을 줘서 눌러 차야 한다. 참고로 EVA 소재는 크록스 같은 신발이나 슬리퍼, 폼 롤러, 가벼운 소재의 공을 만드는 데 주로 쓰인다.


보기보다 힘든 핀 수영

자, 오늘도 서론이 길었다. 핀 수영의 경험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반 수영보다 핀 수영이 편해 보인다. 스윽 나가는 것 같고 스트로크 횟수도 적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여러 가지로 힘들다. 일단 물속에서 내 발보다 훨씬 큰 핀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위해선 하체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 특히 허벅지의 힘이 절대적으로 좋아야 한다. 그래서 같은 바퀴의 랩을 소화해도 사람에 따라선 더 피곤함을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발목을 쭉 펴서 수면과 평행을 유지하면서 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종아리와 발목 힘도 좋아야 한다. 이 힘이 약한 사람들은 종아리와 발가락에 쥐가 나기도 한다. 또, 전체적으로 랩 타임도 빠르고, 일반 수영보다 더 많은 랩을 소화하기 때문에 운동량이 훨씬 많다.


핀 수영의 순번

우리 반에 새로 올라온 아가씨도 나왔다. 시간을 바꿨다는 아저씨도 어떻게 시간을 다시 바꿨는지 우리 레인에 컴백했다. 대신 1번이 빠졌다. 그래서 2번 아저씨가 1번을 서고, 그 뒤로 컴백한 아저씨, 여자 중에서 최고의 에이스인 아주머니, 그다음이 나였다. 그러니까 내가 4번. 그런데 내 뒤에 새로 온 아가씨가 섰다. 우리 반의 다른 아줌마, 아가씨 몇 명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선 것이다.

주로 내 뒤에 서곤 하던 한 아줌마가 그 아가씨에게 물었다. “앞에 서실 거예요?”, “네.”, 난 여기까지만 들었다. 그리고 랩이 시작됐다. 웜 업으로 개인혼영 두 개를 소화하고 핀을 신고 자유형 발차기 네 바퀴, 접영 발차기 두 바퀴를 했다. 아가씨는 잘 따라붙었다. 웜 업이 끝난 후 강사는 메인 세트를 지시했다. 자유형 75m+ 접영 25m. 이것이 한 랩, 10개를 하라고 했다. 아가씨는 여전히 내 뒷자리를 지켰다.

세 번째 랩까지였던가, 아가씨는 내 뒤에 바짝 붙어 왔다. 1번에서 4번인 나까지 다들 한 사람 정도의 간격을 띄우고 수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가씨와의 거리가 더 짧아 보였다. 내심, 아가씨가 더 속력을 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다음 랩에서 아가씨를 먼저 보냈다. 먼저 보낸 김에 한 랩을 쉴 겸해서 맨 뒤로 갔다.


사라진 그녀

그렇게 두세 번의 랩을 돌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다시 4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가 안 보였다.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랩에서 힘든 표정을 짓고 뒤로 가는 것까진 봤는데 그 뒤부턴 아예 보이질 않았다. 속도 때문에 힘들어서 B 반에 가서 하고 있으려니 했다. 일곱 번째 랩이 끝나고 보니 레인 끝, 밖으로 나와 앉아 있었다. 종아리에 쥐가 났는지 남자 강사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메인 랩이 다 끝나고 수경을 벗고 숨을 고르며 보니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접영 몇 바퀴를 하고 마무리로 배영과 접영을 섞어 한 뒤 운동이 끝났다. 접영 랩을 하는 동안 오른 종아리에 쥐가 나서 왼 다리로만 킥을 하며 랩을 소화했다. 다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강사와 함께 파이팅을 외친 후,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너털웃음을 지으며 레인에 팔을 걸고 쉬었다.


내가 물었다. “아가씨가 안 보이네요? 아까 쥐 난 것 같던데...”, 내 앞에 서는 에이스 아줌마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중간에 가는 것 같던데.”, “힘들었나 보네요.”, 내가 말했다. 내 말을 듣고 내 뒤에 주로서는 아줌마가 말을 이었다. “아니, 내 앞으로 가더라고. 그래서 앞에 서실 거예요, 물었더니 그러겠대(여기까진 나도 들었다). 맨 뒤에 서니 쉬지 못하고 바로바로 출발하는 것 같다고 앞에서 하고 싶다고 하데. 나야 땡큐지, 뒤에 서면.”, 그러자 다른 아줌마,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종아리에 검은색 압박대를 하고 오곤 하는 아줌마가 말을 했다. “아이고 앞도 뒤도 다 힘들지.”, “그렇죠. 앞은 앞대로 힘들고 뒤는 뒤대로 힘들죠.”, 내가 말을 이었다.


앞 무리와 뒷 무리의 차이

다른 수영장은 모르겠는데, 대체로 우리 수영장의 중급반과 고급반의 1,2,3,4,5번은 속도와 템포가 비슷하다. 내가 속한 고급 A반도 1번에 맞춰서 돈다. 당연히 속도가 그 뒤에 선 사람들보다 빠르다. 그래서 웜 업을 하면서 자신의 컨디션이 별로 안 좋다고 느끼면 뒤로 간다. 속도가 나지 않고 몸이 안 나가는 날엔 랩을 소화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 반의 1번 주자는, 나온 사람이 적을 땐 4번 주자가 들어올 때까지, 많이 나온 날에는 5,6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출발한다. 좀 늦게 오는 7번이나 8번, 그 뒤의 주자들은 자신이 들어오기 전에 출발하는 걸 보게 된다. 쉬지 못하고, 한숨도 못 돌리고 랩을 도는 듯하다. 그러나 새로 온 아가씨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뒤의 주자는 앞의 주자보다 랩의 길이가 그만큼 짧고 속도도 느리다. 당연히 몸의 피로도도 덜하다. 또, 앞에 사람들이 출발하는 동안,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잠깐 숨을 고를 수도 있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뒤로 가는 이유다.


1번의 무게

우리는 앞서간 사람이 누리는 위치와 여유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앞서간 사람에겐 뒤에 오는 사람이 미처 알지 못하는 그 나름의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 그의 여유는 전력을 다해 먼저 도착한 사람이 누리는 잠시의 틈일 뿐이다. 우린 그 틈, 여유만 볼뿐, 그가 먼저 도착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간과한다.


1번 주자는 앞 주자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물을 저항의 다 받고 헤쳐나간다. 그러나 종종 어떤 사람은 그가 앞서 헤쳐 나간 물살을 간과한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누구보다 더 빨리 헤쳐 나갔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곤 한다.


이런 간과 끝에 무리를 하곤 한다. 몇 단계를 건너뛰어 오르려 한다. 그 사람처럼은 못 되어도 최대한 그 사람에게 근접하기 위해 무리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체력이나 실력을 가늠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반의 흐름과 그 반에 속한 사람들의 실력을 가늠해보지 않고 앞서가는 사람들과 경쟁하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영에만 이런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에서도, 공부에서도, 어쩌면 인생 전체에서도 이런 사람, 이런 경우가 있다.


앞서간 사람의 시간

회사나 업계의 1등이나 리더와 같은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 그 사람처럼 경력도 없고, 수고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고, 실력도 없으면서 대접은 그렇게 받으려 한다. 그 사람이 누리는 위치와 여유를 나도 누리고 싶어 한다. 어쩌면 나도 젊었다면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신입 사원의 눈으로 보면 과장이나 부장, 더 나아가 임원들은 한가로워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형 병원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아내가 최근 승진했다. 3천 명이나 되는 직원 중, 거의 상위 1, 2퍼센트 이내의 위치까지 올랐다. 그 위치까지 오르는 동안 아내는, 열아홉 살 이후 현재까지, 근 30여 년간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현재도 부서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다. 대체 휴일엔 직원들에게 쉬라고 하고 자기가 출근했고, 현충일에는 병원에 중요한 일이 생겨서 점심때 잠시 다녀와야 했다.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 살리는 병원이라는 조직에서 직접적으로 그 일과 상관없는 부서의 장으로서 자신의 부서의 가치와 위상을 알리고 시대의 변화에 맞게 그 과업을 새로 정립하고 부하 직원에게 새로운 미션을 주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왕관의 무게, 세월의 책임감

다른 분야, 다른 직종,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업계의 후배들도 나와 감독과 같은, 이십몇 년의 경력을 가진 선배들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쉽게 일을 따오는 것 같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오기까지 십여 년의 인내가 필요했다. 그런 날이 온 뒤에도 이런 날이 계속 이어지리라 확신하며 맘 편히 있어본 적이 없다. 트렌드에 따라가기 위해 남모르게 애를 썼다.


1번이 얼마나 오래 수영을 했는지 모른다. 그가 얼마나 많은 책임감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1번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가 거저 1번을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나 그 1번의 자리를 1번만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왕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디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왕에서 황태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왕의 자리가 아니라면, 오로지 내 힘으로 차지하는 왕위와 왕관이라면, 그래서 누구나 인정하는 왕이 되기 위해선 왕관의 무게보다 더 무겁지만, 보이지는 않는, 세월을 견디며 실력의 무게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Take your time

어쩌면 그 아가씨는 핀 수영이라면 내가 앞에 선 사람들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을지 모른다. 내 뒤를 한두 바퀴 따라오면서 의외로 따라갈만한 속도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날의 랩은 더 많이 남아 있었고, 앞으로 수영할 날은 아주 많이 남아 있다.


커리어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길고 길다. 멀고 멀다. 그래서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한 사람이 앞서가는 누군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선 수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앞서가는 사람, 자신을 따라, 자신이 낸 길을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의 무게를 짊어질 만한 위치에 이르기 위해서, 또 그 위치에 걸맞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과 경험이 필요하다. 느리더라도 멀리 보고 수행자처럼, 순례자처럼 묵묵히 한걸음, 한걸음 메워가는 인내 어린 시간들이 필요하다.


그러니, 오늘의 일로 낙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리에 쥐가 나서 레인 밖으로 나와야 했던 자신을 책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뒷자리에서 체력과 스피드가 올라올 그날을 기다리며 그야말로 와신상담하며 묵묵히 몇 달 동안 꾸준히 수영을 했으면 좋겠다. 당장 내일, 목요일, 체력 훈련을 하는 날, 아가씨가 빠지지 않고 나왔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조급함을 버리고, 스스로에게 더 관대하며, 약간은 느긋하게 수영을 했으면 좋겠다. 1번을 향한 순번의 계단을 천천히 밟아 오르는 동안 인생의 지혜도 더 깊어졌으면 좋겠다. '한 번에, 단숨에 되는 건 없다. 천천히, 묵묵히, 언젠간 달라질 나를 기다리며 나아가겠다.' 이렇게 다짐하는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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