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나는 언제라도 고꾸라질 수 있는 사람이다.
늘 그래왔지만 단단하게 버티고 있었던 시간들이
먼지처럼 허무하게 흩어진다.
무엇이 나를 살게 했나.
장마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오히려 개운해했다.
세상이 물에 젖은 솜처럼 눅눅하게 무거워져 버리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엔 떠오르지도 않던 느슨한 생각들이 하나둘씩 둥둥 떠오른다.
대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후회에 대한 생각이다.
잉크를 다 써버린 볼펜을 잡고 그려지지도 않는 문자들을 계속해서 그려나간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볼펜 촉에 종이가 찢어졌다. 메마른 볼펜 촉이 그리도 날카로운 걸까? 창문에 빗방울이 여러 줄기로 죽-그려진다. 그리고 동그랗게 말리면서 뚝, 뚝 떨어진다. 그 뒤로 달리는 사람이 보인다. 산책할 때 종종 보이던 소녀다. 피부가 희고 창백한 그 애를 보면 나도 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 아이는 무엇을 향해 뛰는가.
비가 내려 미끄러운 시멘트 타일이 늘어선 광장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고 있다.
작고 빼빼 마른 그 아이는 무엇을 위해 뛰는가.
어느 날부턴가 친구라는 글자는 힘을 잃었다. 아마도 모래성처럼 원체 얄팍한 존재였을 수도 있었다.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그들은 힘없이 무너지고 쓸려나갔다. 밀물처럼 쓸려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는 않는다.
오래된 책자처럼 그 속에 든 내용물들도 쉽게 바스러진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루가 되었다.
취향이 겹치는 친구도 가루가 되었다. 성격이 잘 맞았던 그녀도, 나와 밤새 떠들고 놀았던 그 아이도 가루가 되었다.
아무래도 의미 없는 편지를 쓰고 싶다. 오히려 내 진심이 전달될 수 있는 마지막 손짓이겠지.
이토록 주저앉을 때까지 무엇을 위해 울고 웃었나.
집 밖을 벗어나면 소음들이 너무나 많아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들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실 그곳에 머물렀던 건 나 자신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영영 동떨어진 존재가 될까 봐, 스스로 족쇄를 차고 내가 디딘 자리를 눌러 가라앉을 때까지 억지로 버티고 참았던 것이다.
그때의 나, 거울 속의 나. 얼마나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던가.
요란한 표정들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좋아하던 노래를 목소리 내어 흥얼거렸으나 결코 구슬픈 느낌은 아니다. 아무도 내가 나인 것을 모를 거야. 긴 시간 동안 사랑했던 연인은 하루아침에 변심해 떠나가 버렸다. 그는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에어컨이 고장 나서 등허리로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몸에서 끔찍하게 싫어했던 체취가 난다. 분명 씻어내야 할 텐데 하염없이 땀만 흘린다.
난 무엇을 위해 애를 썼던가.
이제 무슨 말을 하지.
나는 모든 것을 삼키면서 살았다. 당연한 생존 본능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모를 거야. 다 쓴 볼펜을 꿀꺽- 목구멍으로 집어삼켰다.
꼴깍
꼴깍. 꼴깍.
내 숨이 넘어가는 소리던가.
아직도 삼켜야 할 게 남아 있던가.
아- 그것들이 내 목을 뚫고 나오려나.
내 숨을 막으려나.
아무래도 난 여름이 싫다.
엄마가 택배로 복숭아 보내준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