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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멈춤과 시작이 포개지는 계절

[까만 콩작가]

by 은나무


결혼 전, 남편의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였다. '어머니를 고생시킨 할머니가 미웠다'던

남편이 내 앞에서 숨길 새도 없이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돌아가시면 혹여 못 한 기억에 괴롭지 않기를 바라서겠지.' 그것이 그의 잔소리 속에 담긴

깊은 사랑이었음을 나는 그때 알았다.




우리 외할머니는 엄마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에 남편을 잃었다. 가난한 집의 종부로,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을 몸소 증명해 낸 세월이었다.

집은 아직도 칼같이 정돈되어 있고, 그 정리의 단호함처럼 마음도 강했다. 자식에게 기대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 강인함은 때로 자식들에게는 서늘한 한(恨)으로 남았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말 한마디 없이 시골 안과에 가서

덜컥 백내장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 후 읍내에서 집까지의 먼 거리를 버스를 타고 왔다는 그 말에 엄마는 화가 나서 전화기를 끊고는 꺼이꺼이 울었다.

"왜 말도 안 하고 혼자 갔어."


서른여섯, 네 남매를 혼자 키우며 살아가기 위해 할머니는 자식에게조차 기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도 그날 이후 조금씩 달라져갔다.




결혼 후 5년이 훌쩍 지난여름.

아이 둘을 낳고, 이사를 준비하고,

남은 소액의 여유. 그 돈으로 여름휴가를 할머니 사시는

동네 키즈풀빌라로 가기로 했다.


“꽃 중에 제일인 꽃은 인(人) 꽃”이라며 증손주를 안아 주시던 할머니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여름날을 함께 보내 드리고 싶었다.

늘 “멀다, 어렵다” 하시던 분이니

이번에도 거절할 이유를 드리고 싶지 않아 할머니댁 근거리에 수용인원이 많은 곳을 택했다.


외할머니께서는 내가 전화로 휴가 이야기를 했을 때,

아마 귀가 어두워 '밥을 먹으러 온다'는 말로 들으신 듯했다.

여행 당일, 부모님과 할머니댁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점심을 한 상 차려두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는 할머니가 차려주신 점심을 맛있게 먹고

할머니와 함께 움직였다.


아이들이 펜션에서 신나게 물놀이하고 뛰노는 걸 보시던 할머니도 끝내 미끄럼틀을 타보셨다.

나는 순간 단단한 세월 뒤에 가려져 있던 앳댄 소녀모습의 외할머니 웃음을 보았다.



추억으로 남길 사진을 찍기 위해 단체복도 맞췄다. 세탁·다림질까지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열 벌을 챙겼다. 서툴지만, 말 대신 행동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올해 구순. 외할머니는 여전히

"내 자식들 맛난 거 해먹이고 싶다."라고 하신다.


"아직 안 아프고 내 집 깨끗하게 치우고 사니 아직은 다들 나를 좋다고 해." 라며 내 새끼들 밥 해 먹일 힘은 아직 거뜬하다고 애써 스스로 다독이듯 이야기하신다.


생전 안 하시던 증손주들이 보고 싶다는 말도 이제는

자주 표현하신다.

할머니의 그 다정한 변화가 나는 기쁘고 감사하다.



가족은 내 삶의 가장 깊은 뿌리다.

이 뿌리가 흔들리면 내 삶의 정체성도, 방향도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다음을 기약한다.

하지만 누구도 다음을 보장하지 못한다.



어느덧 그렇게 뒤돌아보니 세월은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잘 몰라도, 고맙다는 말부터.

좀 더 멀리 산다면 전화 한 통, 마음 표현이 서툴다면

'서툰 마음을 전하는' 말 한마디라도.

"마음 표현이 아직 어색하지만, 진심으로 감사해요."

그렇게 시간을 촘촘히 채워나가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로 상처를 주기보다 상대가 듣고 싶은 말로 채움 받는 할머니의 시간 또한 따스하길 바란다.


어쩌면 나는 표현하지 못하고 인색했었을 지난 시간을 따스한 온기로 채워주는 지금의 배우자를 만났다는 것도 내겐 큰 행운이자 감사한 일이다.


문득 생각한다.

언젠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계절을 정할 수 있다면,

나는 단연코 봄을 선택하겠다.


봄이 오면 굳게 닫혔던 어른의 마음도 아이처럼 다시 따스하게 피어난다.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달력 앞에서 계획을 세우고, 하루하루 새 생명이 자라나고 언 땅이 녹아내리는

풍경에 감탄하는 그 계절.



후회 없이 사랑을 채우며, 그렇게 조용히 눈감고 싶다.


[[저자 인사]]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여름, 브런치에서

《편식육아마스터 — 밥상 위에서 찾은 사랑의 기록》이라는 매거진을 쓴 작가 까만 콩입니다. 진솔하게 용기 내어 담아낸 제 글에 울림이 있었다면 좋댓구알 부탁드려요.

글을 쓰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저도 응원을 담아 찾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growwith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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