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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름답고 슬픈 계동 집

살던 집 시리즈. 다섯 번째. 계동.

by 조은미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계동으로 이사해서 졸업 후에도 얼마동안 더 살았다. 고된 입시 기간을 보냈던 이곳은 보기에 가장 호사스러웠으면서 동시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맞이한 집이 되었다.


안국동, 가회동, 계동, 제동으로 이어지는 큰길 옆으로 약간의 경사가 있는 넉넉한 도보길이 나온다. 길 끝에 있는 '중앙고등학교'를 향해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대동상고'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 나오고 마주 보는 작은 골목의 막다른 집이 우리 집이었다. 나는 등하교 길마다 남고생들의 무리를 뚫고 다녔다. 기억에 남는 이 두 학교는 수년 전에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이제 나의 옛 동네에는 관광객과 나들이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대문을 열면 왼쪽으로 작은 문이, 오른쪽은 툇마루 달린 문간방이 있다. 오래전에는 안채를 섬기는 이들이 살았던 모양인데 우리는 세를 주었지만 나는 사는 내내 나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한 번도 마주친 기억이 없다. 앞 쪽의 항상 열려있던 미닫이 문의 턱을 넘으면 흰색 바탕 위 푸른색으로 한자 복복자가 써진 돌판이 커튼처럼 마당과 안채를 가렸다. 이 돌 가리개를 빗겨서면 우리 집이 그림처럼 나타났다. 마당 깊은 ㅁ자 한옥이다.


나는 종종 동생들과 안방 다락에 올라가서 놀았다. 특히 주말에 외국에서 손님이 오실 때면, 부리나케 올라가 마당 쪽으로 난 조그만 창을 살짝 열고 그들을 훔쳐보았다. 아버지는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마주한 방에서 손님을 맞으실 때도 있고, 가끔은 서양식 소파 몇 개와 함께 고풍스러운 물건들로 장식된 대청에서 이야기를 나누셨다. 고재 사방탁자 위의 도자기들은 아름다웠다. 대부분 일본인이었던 그들은 곳곳에 놓인 우리의 옛 물건들을 보면 감탄했다. 손님을 맞기 전에 아버지가 손수 황동 수반 침봉에 꽃을 꽂으시던 모습도 생각난다.


110평 우리의 옛 집은 후에 유명 재벌가의 소유가 되기도 했고, 한 때는 '한옥 체험관'이 되어 무슨 예능 프로에도 나왔다고 했다. 몇 년 전 딸아이와 함께 방문했을 때의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대문은 그대로였으나 대문 옆의 집들은 치워지고 다른 골목으로 이어져 이제 더 이상 막다른 집이 아니었다. 청색 복복자가 쓰인 돌 가리개도 사라졌다. 내 방이었던 사랑채와 옆방들을 비롯해 온 집의 문에 무늬 유리가 달린 것을 보았다. 나는 날 좋고 바람 좋은 가을날, 방마다 새 문풍지를 한다고 떼어낸 나무 문살에 구수한 풀 먹인 한지를 입히느라 마당 한가득 사람들로 북적였던 것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동행했던 딸아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마당 나무에 그네를 달아놓으신 일, 큼직한 돌 연못 속 물고기들을 바라보던 일...


집을 둘러보는 동안 화려하게 멋을 낸 문들과 소나무와 바위가 있던 흙 마당에 돌인지 대리석인지 깔아 놓은 것이 낯설었는데, 고개 들어 위를 보니 그 옛날 그대로의 우리 네모 하늘이 보였다. 눈물이 났다.


이 아름다운 집에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동생은 중학생, 막내는 초등학생 그리고 엄마는 고작 마흔셋.


종로구 계동 67-7. 그 옛날의 내 방에서 하룻밤 묶을 수 있는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갔던 우리의 옛 집이 지난 3년의 코로나 시절을 지나 지금은 '한옥 체험 사진촬영 스튜디오'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옛날 우리집에 동생들과 함께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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