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집 시리즈. 여섯 번째. 서초동
늦은 봄, 아빠를 보내드리고 가을이 깊어갈 때 우리는 계동집을 떠날 준비를 했다.
추웠던 겨울의 한옥은 더욱 추워질 게 뻔하고, 엄마도 우리도 아빠 없는 큰 집이 너무 무서웠다. 나는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사시사철 반팔을 입고 지내는 놀라운 모습을 봤던 터라 아파트로 이사하자며 엄마를 졸랐다. 그래서 엄마가 찾은 곳은 '서초동 무지개 아파트'. 딸들과 함께 무지개 같은 아름다운 날들을 기대했던 걸까...
일단 집은 옮겼지만, 엄마는 앞날이 막막했다. 이런 엄마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담임목사는 사업가인 동생을 소개해주었다. 당시 한창 건설 붐을 타고 있는 한강 모래 채취 사업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엄마는 소위 요샛말로 몰빵 투자를 했다. 사업가라는 목사동생의 말에 넘어가 집문서까지 넘겨주었다. 그러나 엄마가 믿었던 그는 경찰조사에서 전과 18범. 투자 전문 사기꾼임이 밝혀졌다. 우리는 서초동 주민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노숙자가 될 판이었다. 두 이모들과도, 성년이 된 나와도 상의 없이 그런 결정을 한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동분서주했던 막내이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되찾지 못했다.
무지개 아파트 B동 403호, 화장실이 춥지 않던 곳, 식구들끼리 종일 잠옷바람이어도 아무렇지 않고, 밤이 되어도 무섭지 않던 이곳에서 매번 따뜻한 겨울을 보낼 줄 알았는데 단 한 번의 겨울 속 온기를 경험하고 떠나야 했다. 집을 나가면서 눈에 들어왔던 아파트 벽에 그려져 있던 무지개보다도 못한 신기루 같은 나날이 흩어졌다.
나는 아버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그 슬프고도 긴박했던 때에도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철없는 고3이었다. 엄마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던 모지리 대학생은 그저 대학 가는 목표 중 하나였던 '연애하기'가 실현되어 즐거웠다. 신입생이 되자마자 만난 나의 첫사랑은 주말이면 아파트 옆 놀이터에서 날 기다렸고 우리는 함께 서초동을 누볐다. 유난히 잦았던 그 해 봄비와 여름 비를 우산 하나에 매달려 쏘다닌 추억만 남긴 나의 첫사랑도 대부분의 첫사랑의 종말처럼 아니, 무지개처럼, 사계절을 채우지 못한 아파트처럼 사라졌다.
내가 살았던 첫 번째 공동주택 무지개 아파트 그 자리에는 지금 초고층 호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